이 칼럼이 마지막이라니, 문득 언제 연재를 시작했는지 궁금해졌다. 2011년 9월 20일,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는 글로 독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1년 하고도 4개월여 동안 2주에 한 번 썼으니 35번쯤 연재했을까?

 

이제는 많이 깎이고 무뎌졌지만, 술 마시면 어른들에게도 막말을 하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시던 대통령에게 감히 반기를 들었던 모난 이미지가 ‘착한 경제학자’로 환골탈태했으니 그것만으로도 횡재에 가깝다.

 

내가 ‘착한 경제학’의 이름으로 현실을 들여다볼 때 내 현미경의 태반은 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이었다. 행동경제학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주류경제학의 인간관에 반기를 들었다. 거슬러 올러가자면 1975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요, 경제학자이자 인공지능 창시자, 한마디로 현대의 마지막 백과전서파라 할 수 있는 사이먼(Simon)의 ‘제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에 이를 것이다. 주류경제학의 가정과 달리 사람은 그다지 합리적이지 않으며 모든 걸 계산한다기보다 주먹구구(heuristics)로 일을 처리한다는 주장이 제한합리성이다. 그러니 사이먼을 행동경제학의 창시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후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심리학자 카네만을 거쳐 최근에는 가장 인기있는 분과로 떠올랐다. 카네만은 인간의 제한합리성이란 완전한 비합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편향을 보인다는 점을 제시했다. 예컨대 그와 티버스키(Tversky)의 전망이론(prospect theory)은 사람이 경제학의 기대효용이론과 완전히 다르게 행동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피자를 시킬 때 토핑을 모두 올려놓은 상태에서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빼는 방식과 자신이 원하는 토핑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주문하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면 어느 쪽에 더 많은 토핑이 올라갈까? 인간이 합리적이라면 당연히 차이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추가하는 주문방식의 토핑이 2분의 1가량 적었다. 즉 어떤 상태를 사고의 출발점(준거점)으로 삼느냐에 따라 확연하게 다른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원래 있던 데서 줄어드는 것을 더 싫어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100원을 벌 때에 비해 잃었을 때 심리적 상실감이 더 크다. 이를 현상유지 편향, 손실회피 등으로 부른다.

 

이렇게 행동경제학은 심리학과 결합하거나 인류학의 결과에 주목해서 사회 현실을 맨눈으로 설명하려 한다. 내가 특히 주목한 분야는 사회적 딜레마의 해법으로서의 협동이었고. ‘인간은 어떤 경우에 협동을 하는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여기서는 진화생물학과 활발한 교류가 벌어졌고 전에 소개한 노박의 ‘인간 진화의 5가지 규칙’은 그 중간 정리였다. 최근에 노박의 책, <초협력자>가 번역 출판되었는데 노박은 인간은 오랜 세월에 걸쳐 협동하는 종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해서 생물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특히 나는 노박의 규칙 중에 집단선택에 주목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사태를 분석한 글에서 이미 밝혔듯이 집단 경쟁에 의한 협동과 집단 정체성은 외부에 대한 적대감을 유발하여 사회적 대립상태로 치닫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 대한 탐구는 노동운동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지 모른다. 노동자는 기업이라는 집단에 속해서 다른 기업과 경쟁하는 동시에 노동자 계급에 속해서 자본가와 경쟁(투쟁)하는 이중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인간은 보통 여러 집단에 동시에 속해 있으므로 한 개인을 구성하는 정체성은 여럿이게 마련이다. 이럴 경우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지도 흥미로운 주제이다.

 

또한 집단선택에서는 개인 수준의 선택과 집단 수준의 선택이라는 공진화(coevolution)가 일어나므로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집단에 변화가 올 수도 있고, 되먹임 효과를 통해 집단 전체의 위기가 초래될 수도 있다. 즉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해묵은 문제를 풀어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다. ‘착한 경제학’은 이런 흥미로운 얘기를 가득 품고 있다. 또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면서 “안녕”이라는 인사를 드린다.

 


* <착한 경제학>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 이 글은 주간경향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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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 칼럼] 복지국가 사회규범의 생성과 내면화

"결국 문제는 남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북유럽은 그런 신뢰가 쌓여서 사회규범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규범을 내면화 했다."

 

지난번에는 납세자 쪽의 무임승차를 얘기했지만 경제학자들이 툭하면 들먹이는 것은 ‘수혜자’ 쪽의 무임승차다. 만일 실업급여로 이전 월급의 80%를 받는다면 툭하면 회사 그만두고 일하지 않는 베짱이가 될 것이란 얘기다.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이런 현상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독일과 스웨덴의 축구경기가 있는 날, 또는 그 다음날에 병가(스웨덴에서는 병가는 유급이며 진단서를 낼 필요가 없다)가 대폭 늘어나는 현상은 분명 무임승차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막기 위해 영미형에서는 잔여복지 또는 선별복지(‘맞춤형 복지’라는 말도 다분히 잔여복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를 시행한다. 국가는 생존권을 보장하는 수준의 복지만 제공해야 한다는 ‘경험적 자유주의’(프리드만, 하이예크)가 이런 정책을 뒷받침하는 철학이다. 이들 나라에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시장에서 얻는 수입, 그리고 가족에 의해 삶을 누려야 한다. 따라서 국가로부터 복지를 받으려면 이런 기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따라서 철저한 자산조사(means test)가 필수적이며, 무상급식 논쟁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해진 낙인효과(stigma effect)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각각 고유한 문제를 안고 있는 셈인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은 이 두 번째 무임승차 문제를 훌륭하게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 특별히 실업률이 높은 것도 아니고 고용률(15세에서 64세까지의 인구 중 취업자 비율)은 뚜렷이 높다. 어떻게 이런 신통한 일이 가능한 것일까? 첫 번째 이유는 북유럽 국가들이 오래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에서 찾을 수 있다. 행동경제학에 따르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이 불운을 당했다면 기꺼이 그를 도우려고 한다. 반면 노력할 여지가 충분한데도 도움을 청하면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기 일쑤라는 것이다.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은 스웨덴의 노동조합(LO)이 연대임금제도를 시행하면서 그 부작용으로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이 파산하자 내놓은 대책이었다. 실업자가 된 이들이 재교육·훈련을 거쳐 다른 기업에 취업함으로써 완전고용도 달성하고 산업구조도 고도화될 테니 일석이조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노동자 주도의 구조조정인 셈인데, 고용률이 높아져 세금을 더 많이 거둘 수 있어서 이 정책은 보편적 복지국가의 원동력이 되었다.
 

스웨덴 고용청 사무소에서 실직자들이 일자리를 검색하고 있다. l 출처: 경향DB


치열한 시장경쟁은 언제나 패배자를 낳으며 누구나 판단 실수로, 또는 단순한 불운으로 패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성실한 노력으로 누구나 재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으랴. 결국 문제는 남을 믿는 것이고, 동시에 남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일이다. 북유럽은 그런 신뢰가 쌓여서 사회규범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 규범을 내면화했다. 이런 사회에서 남들이 낸 돈으로 그저 놀고 먹는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정부의(또는 국민 스스로 선택한) 적절한 정책과 사회적 신뢰, 이것이 보편적 복지국가에서 두 번째 무임승차를 막는 첩경인 것이다.
 
반면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전제한다면, 따라서 무임승차가 필연이라면 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통해 사전에 그런 가능성을 봉쇄해야 한다. 행동경제학은 이렇게 상대가 자신을 나쁜 놈 취급하면 사람들이 딱 그 수준에 맞춰서 행동한다는 것을 거듭 증명했다. 예비군복만 입히면 남자들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사회에서는 이기적 행동이 당연한 것이 되고 착한 사람은 오히려 바보(sucker) 취급을 받게 된다.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하기’(Bowling alone)에서 집어낸 미국 사회의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북유럽처럼 신뢰로 가득찬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극도의 경쟁만 가득찬 현재의 한국에서 보편복지를 시행하면 무임승차가 만연하지나 않을까? 다음번에 다룰, 정말 고민스러운 주제이다.

 

이 글은 주간경향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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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onnes 2012.02.16 13: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95년도경 뉴질랜드에서 1년정도 체류한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나라는 실업수당과 학생수당을 거의 제한없이 지급하고, 교육및 의료비를 100% 지원함으로써 일반 서민으로서는 환상적인 나라였습니다. 헌데 이미 만성적인 재정적자의 누적으로 국가의 주요 기간산업인 철도, 전기, 통신등을 매각해서 민영화하였고, 예산의 70%를 사회복지예산으로 지출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운용에 한계가 왔지요. 심지어 지방의 도로가 홍수에 유실되도 이를 복구하지 못해 방치하는 경우까지 생겼습니다.

    그당시 전 인구의 1/3은 노,소년,주부등 피부양자, 1/3은 실업자, 1/3은 경제인구였는데 (이는 거의 모든 나라의 공통현상으로 보여짐) 경제인구에 해당하는 1/3은 고율의 세금 33% -50%까지 부담하는 것에 크게 세금저항이 없었던 사회분위기였습니다. 정선생이 말한 전통적인 사회적 결속력과 상호간의 신뢰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후 동양인 이민자가 급증하고, 반칙이 생기면서 안그래도 모자라는 재정상황에 이런 시스템의 균열이 일어났지요. 제 느낌엔 그당시 수당을 받는 실업자중 자진해서 일할 의사를 갖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열의가 없었고 전체적으로 사회는 침체된 모습이었습니다.(그나라에 비하면 한국은 너무나 역동적인 모습이지요)

    결국 당시 이문제를 바라본 결론은 이방식의 복지사회는 성장잠재력을 감소시킬수 밖에 없는 구조일 것 같습니다. 현제 뉴질랜드는 상속세, 법인세 감액과 실업수당등 복지지출의 감액등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급속히 전환한다는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복지와 성장의 두가지 문제가 공존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 생각합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복지사회를 지향하지만 아직까지 이상적인 복지모델을 발견하지 못하는군요.

  2. yonnes 2012.02.17 10:5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대중정부가 처음도입한 실업수당 - 실직후 6개월간만 지급, 재취업노력이 있어야만 지급하는 정책- 을 보고 기존 사회주의국가보다 훨씬 선진적인 복지모델이라 생각했는데 이 역시 큰 도움이 되기에는 역부족인것 같군요.
    복지냐,성장이냐를 떠나 더 큰 문제는 이세계는 금융자본의 자본흡입력이 너무 큰 관계로 선후진국 막론하고 중산층이하 시민들은(흔히 99%) 아무리 노동을 해도 자본을 축적할수 없고, 엘리트들도 한순간에 빈곤으로 추락할 위험에 처한 아주 이상한 세계에 있다는 점입니다. 복지는 복지대로 추진하되, 금융자본의 농단을 대처할만한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결집이 필요한것이 중요한것입니다. 부의 편중을 막을 강한 권력을 형성하는데 결집이 필요하고, 이를 위한 정치적 세력형성에 촛점을 맞추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무엇이 되었던 특권과 금융이 결합한 기득권층에 맞설수 있다면, 입진보식 비판보다 결집을 우선으로 하여 세로운 세력형성에 일조하는 것이 복지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라 제안합니다.


‘보편적 복지국가’가 내년 총선·대선의 화두 중 하나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해서 각 당은 복지재정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내 보기에 ‘진보개혁진영’이 썩 유리하기만 한 건 아니다. 보편적 복지국가란 기여(돈을 대는 사람과 액수)와 급부(복지 수혜자와 액수)가 서로 무관하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복지국가는 ‘착한 경제학’의 핵심 주제인 사회적 딜레마에 속한다.

사회적 딜레마는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이 어긋나는 경우를 말한다. 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 ‘공유지의 비극’, ‘집단행동의 함정’, 그리고 보수적 경제학자들도 인정하는 ‘공공재의 딜레마’가 모두 사회적 딜레마이다. 이미 얘기했듯이 사교육은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이며, 현재 인류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그것이 ‘공유지의 비극’에 속하기 때문이다.

개인(또는 한 나라)의 이익만 좇는다면 무임승차(free riding)를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게 사회적 딜레마의 핵심이다. 예컨대 그래도 품격 있는 나라로 보였던 캐나다가 최근에 일방적으로 교토 기후협약에서 탈퇴한 것도 공유지의 비극을 증명한 것에 불과하다.

모든 나라가 노력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면 우리 아이들이 살아날 수 있다. 너무나도 명백하게 이것이 전 세계의 이익이지만, 우리나라만 필요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으려면 자동차를 덜 타야 하고, 각 공장은 탄소를 줄이는 장치를 도입해야 한다) 우리는 무임승차에 의해 최대의 이익을 거두게 될 것이다.
하여 각 나라가 얼마나 의무를 져야 할 것인지 자체가 교토 기후협약의 핵심 쟁점인데, 미국과 중국이 그 의무에 동의하지 않고 있다. 중국 바로 옆에 있는 우리 국민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면 뭐 하나. 중국에서 이산화탄소가 한반도로 다 날아올텐데….” 그래서 우리도 탄소배출 규제를 하지 않는다면(예컨대 탄소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사회적 딜레마인 ‘집단행동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뻔히 알면서도 인류는 멸망으로 일로매진하게 된다.


보편적 복지국가도 마찬가지 운명이다. 1990년대 초반에 스웨덴이 경제위기에 빠졌을 때 경제학자들은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로 ‘스웨덴 병’을 진단했다. 한 마디로 “일하지 않아도 그럴 듯하게 살 수 있다면 누가 일할 것인가?”이다. 나아가서 그렇게 ‘배부른 돼지’들을 늘상 본다면 어느 누구도 세금을 더 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지를 축소해서 시장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도록 해야 한다. 즉 대안은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시장 만능의 미국은 끝도 없는 위기에 빠졌고, 스웨덴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성장과 복지, 즉 평등과 효율을 동시에 누리고 있다. 스웨덴은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한 것이다. 사회적 딜레마 게임으로 간단하게 입증했듯이 ‘신뢰와 협동’이 그 답이다. 20년 넘게 매년 하고 있는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의 ‘일반적 신뢰’(generalized trust·‘당신은 남을 얼마나 믿는가’) 항목에서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이 언제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나라의 일반적 신뢰는 중상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더 끔찍한 것은 15살가량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압도적 꼴찌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극단적 경쟁교육을 생각해보면 이 결과는 자업자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 복지국가를 하겠다는 건 언어도단일 것이다. 진보개혁 진영이 보편적 복지국가를 주장하려면 앞으로 한국에 신뢰와 협동이 흘러넘치도록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 과연 그럴 방법이 있을까? 있다! 다음 호를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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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서 평등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독자들께서는 대부분 ‘고교 평준화’를 떠올렸을 것이고, 곧 이어서 ‘주입식, 암기식 획일교육’까지 연상하셨을 것이다. 이주호 교과부 장관이 ‘고교 다양화’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극단의 경쟁을 도입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연상에 근거한다.

과연 그럴까? 답은 단연코 “아니오”이다. 평등교육으로 유명한 핀란드 교육이 주입식, 암기식인가? 정반대다. 교육에서 평등이란 말 그대로 등(等)수가 없다(平)는 것을 의미한다. 재작년 핀란드에서 나는 에리키 아호를 만났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핀란드의 교육개혁 40년 역사 중 처음 20년 동안의 국가교육청장이었다.

은발의 이 노신사는 매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등수라니요? 이 아이는 달리기를 잘 하고, 얘는 수학을 잘 하고, 이 친구는 음악에 발군인데 아이들의 순서를 어떻게 정한다는 얘기죠?” 이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리는 환하게 밝아졌다. 평등이란 등수를 매길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하여 핀란드 선생님들의 역할은 아이가 어떤 분야를 좋아하는지 파악해서,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다.

에리키 아호

등수를 매기려면 아이들의 학력을 하나의 숫자(scalar)로 환산해야 한다. 그러려면 수학이나 영어에는 가중치 100이나 90을 주고, 체육이나 음악에는 10 또는 5를 부여해야 한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하는 짓이다. 전국이 단일한 시험을 보고 그 점수에 따라 인생이 결정되니, 모두 똑같은 내용을 배워야 하고 ‘찍기’에 의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전국 등수와 일제고사. 이것이 획일식, 암기식 교육의 근원이다. 아이들이 자살하고 심지어 어머니를 살해하는 끔찍한 사태의 원인도 이것이다.

 
평등은 다양성을 낳는다. 자기가 좋아하는 걸 더 잘 하면 된다. 바로 이 다양성이 효율성을 낳는다. 3년에 한 번 15살 정도 아이들을 대상으로 PISA라는 국제학력평가를 치르는데 핀란드는 10년 동안 3연속 종합 1위를 차지했다.
 
우리 아이들도 발군의 성적을 올리고 있다. 대체로 핀란드 바로 뒤의 자리를 유지해 왔다. 학력에 관한 한 어깨를 나란히하는 두 나라 아이들이 정반대의 응답을 하는 질문은 “얼마나 좋아서 공부하는가?”이다. 상상하시는 대로 핀란드 1위, 우리는 일본과 함께 꼴찌다. 우리 아이들이 핀란드에 비해서 거의 두 배의 공부를 한다는 것도 여기에 추가해야 한다.

아이들뿐 아니다. 어른들도 두 배로 일한다. 그런데 1인당 GDP는 핀란드가 두 배다. 우리들이 핀란드 사람보다 4배나 못났을까? 그럴 리 없다.
만일 어떤 직업을 택한다 하더라도 월급도 별 차이가 없고 사회적으로 비슷하게 인정받는다면 당신은 어떤 직업을 택할 것인가? 자기가 잘 하고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일을 택할 것이다. 핀란드의 수도배관공과 교수는 비슷한 월급을 받는다. 더구나 이 나라의 보편복지는 어떤 직업을 택해도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준다. 시장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선택의 자유’를 어느 쪽이 더 확실히 보장하는 것일까?

 
북유럽 국가의 일반적 신뢰(generalized trust·‘다른 사람을 얼마나 믿는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최근의 연구들은 소득불평등도가 신뢰도를 결정하는 요소 중 가장 중요하다는 데 거의 100% 합의했다. 신뢰는 사회적 딜레마를 해결해서 효율성을 높인다. 다음 번에 이야기할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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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1500억원에 달하는 주식을 사회에 환원했다. “기업이 존재하는 것은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숭고한 가치가 있으며,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보다 큰 가치도 포함된다고 믿어 왔다.” 더 말을 보탤 것 없이 훌륭하고 또 훌륭하다. 금융권 인사들도 이 흐름에 동참할 것이라고 하니 우리 사회에 기부 문화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자 정치인들이 ‘악어의 눈물’을 흘리며 내놓는 돈이나 재벌들이 범죄를 면하려고 토해낸 돈과 비교하는 건 말 그대로 언어도단이다. 그 어떤 정치적 의도가 있다 하더라도 안철수 원장의 기부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1500억원은 적은 돈이 아니지만 이자율을 10%로 쳐도 유량(flow)으론 150억원 정도이다. 우리의 재정과 기금 등 예산은 1년에 300조원 정도니까 2만분의 1에 해당하는 돈이다. 즉 안철수 원장 같은 부자 2만명이 비슷한 액수의 돈을 내면 우리는 매년 두 배의 예산을 운용할 수 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7000명 정도가 동참해서 유량으로 100조원을 내놓는다면 OECD 수준의 복지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
국가가 강제로 내게 하는 세금과 비교하면 개인의 만족도로 보든 사회적 인정이라는 면에서 보든 더 나은 방안임에 틀림없다.

“깨몽”이라고 외칠 분들이 많을 것이다. 영미권은 기부에 의한 복지를 추구해온 나라이고, 북유럽은 세금에 의한 복지를 이뤄왔다. 현실에서 어느 쪽 복지가 더 나은가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하여 미국의 부자인 워런 버핏이 부자 증세(버핏세)를 외치고 있지 않은가?
물론 기부와 세금을 섞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는데 일정 액수의 기부에 대해 면세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러하다. 나아가서 일정 규모 이상의 세금에는 예컨대 ‘안철수 세’라고 이름을 붙여주고 “보육시설에 쓰라”는 식으로 용도를 지정할 수 있게 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안철수씨는 뭐가 그리 잘나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번 것일까? 내가 아는 한 경제학의 답은 그리 신통치 않다. 사회에 대한 한계기여에 따라 돈을 버는 것이라는 답은 그럴 듯할까?
예컨대 김태희씨가 광고에 나가면 1000만원어치 1회용 커피가 더 팔린다고 하자. 그럼 기업 입장에서 김태희씨의 한계기여에 따라 출연료를 1000만원 준다는 게 정당할까? 다른 탤런트가 출연하면 500만원어치가 더 팔리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몸값 차이가 500만원인 게 당연하다는 경제학의 주장은 정당할까? 김태희씨가 드라마 한 편에 수천만원의 출연료를 받는데, 그 드라마를 쓴 보조작가는 굶어 죽는다면 그게 정의로운 일일까?

어쩔 수 없이 한계기여를 시장에서 측정한다 하더라도 안철수씨나 김태희씨한테 내재해 있는 그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일까? 특히 안철수씨의 경우 V3를 제작할 때 수많은 지식을 공짜로 이용했을 것이다. 예컨대 아무도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사용할 때 돈을 내지는 않는다. 아마도 안철수씨가 스스로 창안해낸 지식의 수천만 배의 지식을 공짜로 사용했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천재들이 만들어낸 지식은 거의 모두 공공재이다. 즉 그의 사회적 기여의 한계 시장가치가 1000만원이라면 그 중 999만원 이상이 인류 역사로부터 나온 것이다.

나는 기부가 여러 모로 세금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부는 사회로부터 입은 혜택을 사회로 되돌리는, 말 그대로 ‘사회환원’이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안정적인 복지를 원한다면 당연히 내야 할 기부액수의 일부를 세금으로 확보하는 것 또한 훨씬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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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사람을 착하게 살지 못하도록 한다. ‘착한 경제학’도 마찬가지 운명인 모양이다. 또 한 주 일탈을 해서, 요즘 유행어가 된 ‘투자자-국가 강제 중재’(Investor State Dispute, ISD)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국적을 불문하고 어떤 투자자가 국가의 정책에 의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면 뭔가 문제를 해결할 길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FTA 투자 챕터의 핵심이고, WTO와 같은 다른 국제협정의 투자 챕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부가 똑같다고 주장하는 80여개 중 ‘강제 중재’, 즉 정부가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은 31개뿐이다. 더구나 FTA에 들어 있는 ISD와 투자협정에 들어가 있는 ISD는 또 다르다. 정부에 불리한 결정이 나서 정부가 이에 불복했을 때 한·미 FTA의 ISD는 보복관세를 물릴 수 있도록 했다.

실제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를 들어보자.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의 정동영 후보는 암의 건강보험 보장성 100%를 내걸었고, 현재의 대선후보들 역시 이 정책을 빼 놓지 않을 것이다. 보장성 100%란 건강보험에서 보험금을 전액 내주기 때문에 본인부담금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당연히 민간 암보험을 따로 들 필요가 없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미 들었던 암보험도 해지할 것이다. AIA(구 AIG)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니 건강보험공단(또는 보건복지부)을 대상으로 ISD를 걸 수 있다. AIA가 한 명의 법률가를 고용하고 건보공단도 한 명의 변호사를 선임한다.
그리고 둘이 합의해서 또 한 명의 법률가를 선임하여 재판장으로 삼는데, 만일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에서 재판장을 결정한다. 

이들은 건보공단의 정책이 한·미 FTA를 위반했는지 여부에만 관심이 있다. 흔히 문제가 되는 원칙은 내국민대우, 최혜국대우, 최소기준대우이다. 명백히 내국민대우와 최혜국대우는 위반하지 않았다. 삼성 암보험도 같이 망할 것이고, 영국이나 일본의 암보험도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기준대우 위반 여부는 아무도 모른다. 국제관습법에 비춰볼 때 과도한 정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암 100% 보장이 국제관습일까 아닐까? 확실한 것은 미국의 관습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제관습에 어긋난다고 세 명의 민간인이 판단하는 순간 휴지조각이 되고 정부는 그 피해액을 현금으로 보상해야 한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공무원들은 미국인 투자자의 이익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정책은 아예 기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유통법과 상생법, 우리 농산물 무상급식이 이미 겪은 일이다. 이렇게 공공정책의 강화를 사전에 막는 것을 위축효과(chilling effect)라고 한다.
정부는 우리가 한 번도 ISD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북한의 핵무기는 한 번도 터지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공공정책은 예외라고 주장한다.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나 다른 투자협정에도 그런 예외 조항이 있지만 현재까지 제기된 ISD의 대상은 거의 모두 공공정책이었다. 왜 공공정책의 운명을 민간 법률가 세 명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가? 이는 공공행정의 영역을 사적인 중재에 맡기는 것이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예에서 보듯이 경제위기 때 국가가 취하는 긴급조치도 ISD의 대상이다. 도대체 우리의 삶과 국가의 운명을 왜 외국인들, 그것도 경제 문외한들에게 맡겨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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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pra shoes 2013.04.16 04:1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바보같이 이제야 그것이 사랑이란 걸 알았습니다.


지난번에 교육문제의 실마리를 풀겠다고 했지만 잠시 쉬어가야 할 것 같다. 한·미 FTA의 국회 비준을 앞둔 ‘끝장토론’을 하느라 교육에 관해 충분히 읽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보았듯이 사교육 경쟁을 하면 할수록 부자들에게 유리하다. 경쟁으로 인해 사교육 값이 무한정 올라가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게임을 지배계급이 설계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 아이를 위해 온힘을 다 하면 다할수록 그들의 승리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진다. 즉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들을 패배자로 내모는 것이다. 물론 언제나 극소수 예외는 있을 테지만 우리 아이가 그 예외일 가능성은 0에 가깝다.
그래도 우리가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고, 결국 게임의 설계자는 너무나 손쉽게 이들을 영원히 지배할 수 있다. 즉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하면 일반 대중의 경쟁을 이용하여 자기 뜻대로 지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사례가 있을까? 있다. 지금 세계은행 총재로 있는 로버트 졸릭이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로 있을 때 내놓은 ‘경쟁적 자유화(competitive liberalization)’가 바로 그러하다. 원래 미국은 WTO를 통한 다자간 무역 자유화를 추진했지만 다자간투자협정(MAI)의 경우처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의 반대, 또 FTAA(아메리카 대륙 FTA)처럼 후진국들의 단합에 의해 뜻을 충분히 이룰 수 없자 양자간 협정, 즉 FTA를 추진하게 된다.

로버트 졸릭


 졸릭은 미국의 시장을 놓고 각국이 경쟁하는 그림을 그린다. 경쟁적으로 미국 시장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들에게 상품시장을 내주고, 대신 상대국의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 부문을 WTO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열어젖히겠다는 전략이다.

10월 20일 끝장토론에서도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이 되뇐 얘기지만, 한·미 FTA를 개시할 때 김현종 당시 본부장은 두 가지 주장을 내세웠다. ‘남들이 미국과 FTA를 맺기 전에 우리가 먼저 미국 시장을 선점하자!’ 이명박 대통령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세계 1위의 경제영토를 가진 나라가 된다. 이분의 뇌 속에서는 모든 사고가 땅에서 시작해서 땅으로 끝나는 모양이다.
또 하나의 주장은 모든 나라가 다 FTA를 맺는데 대한민국만 FTA 후진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남이 하기 전에 내가 먼저 한다.” “남이 하면 나도 한다.” 바로 죄수의 딜레마를 판정하는 리트머스 시험지 그대로 아닌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가 협상을 개시한 2006년 2월 이후 지난 6년 가까이 중남미 국가들과 한국 빼곤 이 함정에 빠진 나라는 없다. 한·미 FTA 찬성론자들은 졸릭이 쳐놓은 죄수의 딜레마 함정에 자신들이 빠졌다는 자각이나 있을까?

1929년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빗대어 대침체(Great Recession)로 이름 지은 현재의 위기는 바야흐로 일본식 장기침체(Long Recession)로 빠져들고 있다. 이제 재정확대정책도, 금융완화정책도 여의치 않은 미국에 수출은 유일한 활로다. 동시에 수입은 줄여야 하니 노골적인 보호주의 정책도 쏟아져나올 것이다. 그런데 바로 거기에 한국이 스스로 문을 연단다.

FTA만 맺으면 5~6%의 추가성장이 가능하다고 스스로 조작한 숫자에 환호하며 기꺼이 서비스시장을 개방하고 지적재산권을 강화한다니 그 얼마나 고마운가. 이미 파산이 증명된 시스템을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굳게 믿으니 그 또한 얼마나 고마운가. 아이들을 살리려면 현재의 사교육 경쟁에서 벗어나야 하듯이, 한·미 FTA를 비준하지 않아야 우리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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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ike Outlet 2013.04.03 20: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한세계를 놓고 말하면 당신은 한 사람이지만,단 한사람을 놓고 말하면 당신은 그라삼의 세계입니다.

  2. cheap supra shoes 2013.04.24 21:2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가는 자는 쫓지 말지며, 오는 가는 막지 말라.


아이를 둔 보통 부모에게 교육만큼 절박하면서도 그저 막막하기만 한 문제도 없을 것이다. 있는 돈 없는 돈 다 들여 과외시키고 애들 닦달하는 것 외에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 때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 사회에서 아이가 과연 승리(?)할지 자신이 없다. 행동경제학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사람은 자신의 능력과 운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마저 없었더라면 벌써 희망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지난번에 말한대로 우리는 모두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고 개인이 홀로 이 함정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모두 남이 시키니 어쩔 수 없이 나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사교육에 들인 돈만큼 등수가 올라가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 그렇게 믿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두 똑같은 사교육을 시킨다면 등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해 돈을 썼을 뿐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더 나쁘다. 우리는 등수를 올리는 ‘더 좋은’ 사교육이 있다고 생각하며, 그 사교육은 더 비쌀 거라고 확신한다. 이제 사교육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요즘 그러하듯 부동산 가격은 주춤거릴 수도, 그리고 곧 곤두박질칠 가능성도 있지만 사교육 값은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들이 아이들 대학교육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할아버지의 재산과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은 정확히 이 게임의 성격을 짚고 있다. 높은 사교육 가격은 물론 부자들에게 유리하며, 서울대에 가보면 이 농담이 단순한 우스개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로또 심리라는 가느다란 희망 줄에 매달려 가망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만 절망적인 게 아니다. 나라 전체로 보면 더 심각하다. 세습귀족이 생긴 나라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게 그 첫째요, 어떻게든 승률을 높이려고 하나만 낳아 인구가 줄어드는 게 그 둘째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아이들이 머릿속에 구겨넣은 지식이란 게 구글 검색으로 언제든지 즉각 찾을 수 있는 것들뿐이다. 미래에 필요하다는 창조력과 상상력은 암기에 밀려 체계적으로 말살되고 있다. 아이들에게 과연 ‘밝은 미래’가 있을까?


상위 10%를 빼고는(장기적으로는 이들에게도 불행이다) 모두에게 불행인 이런 게임에서 벗어날 길은 과연 없을까? 있다. 지난 2009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오스트롬 여사가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주제로 평생을 연구한 것이 바로 과거에 인류를 죄수의 딜레마에서 해방시켰던 지혜, 그리고 그 논리적 해명이다.

또다시 게임이론으로 단순화하자면 그것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사슴사냥 게임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남이 협동하는 경우 나도 협동하는 게 이익이 된다. 즉 남이 배반할 경우엔 나 역시 배반하는 게 낫지만 협동한다면 탐욕에 의해 이를 이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실제로 남들이 안 시킨다면 나도 애들 놀리고 싶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는가? 해서 엄마들은 외친다.

“제발 국가라도 나서서 모두 사교육시키지 않도록 해주세요!” 그렇게만 된다면 아무리 입시제도가 비합리적이라 해도 최소한 공정경쟁은 확보하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 교육감 선거의 결과는 그런 엄마들의 소원을 반영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아이들의 불행이니 우리 스스로 풀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다음 글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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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딸라 2011.12.19 12: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육관련 기사들을 읽다가 경제방까지 오게 되었네요.
    여전하시군요. 잘 읽었습니다. ^^


그래도 인간은 이기적인데…. “인간이 이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 지난번 글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기적인 사람들로 바글바글한 게 사실이다. 또한 생물학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인 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인간은 본성상 이기적일 것 같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당신은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고,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는 “예”라고 대답한다(스스로에게 질문하시기 바란다). 여기에 중요한 열쇠가 숨어 있다.

앞으로도 자주 등장할 간단한 게임 하나를 소개한다. 다소 어렵게 느껴질지라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아주 유용한 게임이니 잠깐만 집중하시기 바란다.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쉬가 논문을 제출하자 지도교수는 “자네가 지금 뭘 했는지 아는가? 150년 된 경제학을 모조리 부정하고 있다네”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진짜로 그랬을까는 지극히 의심스럽다).
“개인은 자신만의 이윤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결국은 의도하지 않았던 목표, 즉 공익의 증진에 기여하게 된다”는 아마도 경제학에서 제일 많이 인용되었을 아담 스미스의 통찰이 부정됐다는 것이다. 바로 ‘죄수의 딜레마’라고 하는 게임이다.


보수를 나타내는 각 칸의 첫 번째 숫자가 경기자 I(나)의 보수이고 두 번째 숫자가 경기자II(상대방)의 보수이며 C는 협력, D는 배반을 나타낸다. 내가 이기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각 칸의 앞 숫자를 비교해서 더 큰 쪽을 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보수가 (D,C)=4 > (C,C)=3 >(D,D)=2 > (C,D)=1의 순서라면 언제나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된다. 상대방이 협력(C)를 선택했을 경우 내 보수는 C=3, D=4이므로 D를 선택할 것이고, 또 상대반이 배반(D)를 선택한 경우에도 내 보수는 C=1, D=2이므로 역시 D를 택해야 한다.
즉 상대가 배반을 하든, 또는 협력을 하든 나는 배반을 하는 게 이익이다. 상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므로 우리는 동시에 배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일부러 꾸며낸 숫자 예처럼 보일 테지만 우리 주위에 이런 상황은 널려 있다. 나의 보수 크기가 협력보다 배반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죄수의 딜레마게임이다. 혹시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때, 자문해봐야 할 리트머스 시험지는 이렇다. “남이 다 하면 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다”(공포), 그리고 “남이 다 안 하는 경우 나만 하면 ‘대박’이다”(탐욕).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바로 사교육이 그렇다. 그리고 부동산(주식)에 대한 우리 태도도 비슷하다. 남들이 다 과외시키는데 우리 애만 마냥 놔둘 수 없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사는데 나만 유유자적, 안빈낙도 하다간 영원히 셋방살이 신세일 거 같다면 우리는 죄수의 딜레마 함정에 빠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글 첫머리에 한 질문의 답이 있다. 남들 대부분이 이기적이라고 대답한 분들은 바로 위 표의 오른쪽 상황을 맞고 있다. 즉 상대방의 배신에 하릴없이 당하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모두 그렇게 행동한다면? 각자는 이기적이지 않은데 그런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는 이기로 가득찬 상황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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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하면 나도 따라 할 수밖에 없는 ‘공포’와 남이 안 하고 나만 대박을 내고 싶어하는 ‘탐욕’에 갇혀 있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정태인 원장은 현재 우리 경제를 이렇게 진단합니다. 정태인 원장은 ‘공포와 탐욕의 경제학’의 대안으로 신뢰와 협동의 ‘착한 경제학’을 제시합니다.
<주간경향>은 이번 주부터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벗어나 사람 사는 세상의 따뜻한 경제학을 독자 여러분과 모색해보려고 합니다. 정태인 원장의 <착한 경제학>은 격주로 실립니다. <편집자주>

요즘 강연에서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질문이 있다. “인간은 이기적일까요?” 대부분의 청중이 그렇다고 시인한다. 그건 정말로 우리 사회가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남들이 이기적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나 손해를 보는 바보가 될 뿐이다. 앞으로 하나 하나 설명하겠지만 이런 태도는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의 두 가지 행동 중 하나(공포, 상대가 이기적으로 행동할 경우 나도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이다.

실로 우리 사회는 극도의 불신으로 가득 차 있다. 세계가치조사(World Value Survey)에 따르면 우리의 일반적 신뢰, 즉 “당신은 얼마나 남을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긍정은 세계의 중간 정도를 차지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신뢰가 떨어지는 속도가 세계에서 제일 빠른 나라이다. 더구나 15살짜리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는 세계 최하위로 나타났으니 지금도 팍팍한 세상이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 확실해 보인다.

과연 인간은 이기적일까? 나는 “여러분이 이기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겠다”고 호언한다. 내 무기는 이른바 “최후통첩게임”(Ultimatum Game)이다. 독자 여러분도 스스로 해 보시면 안다.

청중들이 두 사람씩 짝을 짓게 하고 임의로 한 사람은 A, 다른 한 사람은 B를 맡도록 한다. A에게 하늘에서 1만원이 떨어졌다고 하자(실제 실험에서는 실험자가 1만원씩 나눠 준다. 물론 내 강연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횡재를 한 A는 B에게 얼마를 줄지 제안한다. B가 할 역할은 예스, 또는 노이다. 만일 예스라고 대답하면 A가 제시한대로 분배가 이뤄지고 게임은 끝난다.
예컨대 A가 3000원을 주겠다고 제시했는데 B가 예스하면 A:7000원, B:3000원이 되는 것이다. 한편 B가 어떤 이유로든 노라고 대답하면 둘 다 한푼도 챙기지 못하게 된다. 여러분이라면 A의 처지에선 얼마를 제시하고 B의 처지라면 어떻게 대답할까?(실제로 옆 사람과 해 보시기 바란다.)

경제학이 가정하는대로, 그리고 청중들이 대답한 것처럼 인간이 모두 호모에코노미쿠스(자신의 이익만 신경쓴다)라면, 즉 A도 B도 이기적이라면 답은 A:9999원 대 B:1원이다. 이기적인 B는 무일푼(노라고 대답했을 경우)보다는 1원이 낫기 때문에 예스를 택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A는 1원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수천, 수만번 행해진 이 실험에서 이 정답을 맞춘 응답자는 단 한 명도 없다. 거의 대부분이 4000원에서 5000원을 제시했고 2500원 미만인 경우에는 B가 노를 택한 경우도 꽤 많이 나온다.

즉 인간은 이기적이지 않다. 인간은 언제나 남을 생각하며(other regarding), 상대방이 현저하게 불공정하게 행동할 때는 손해를 보더라도 응징한다. 잠깐만 생각해 봐도 우리 대부분이 그렇게 행동한다. 학자들은 이런 인간의 본성을 상호성(reciprocity)라고 부르는데 앞으로의 연재는 이 속성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상호성에 맞춘 행동과 규범, 제도가 우리 사회를 훨씬 더 따뜻하게 만들 것이고, 신뢰와 협동이야말로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드는 첩경임을 보일 것이다. 적어도 인간은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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