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3.04.29 어느 해 봄의 개성
  2. 2013.04.07 녹색성장과 창조경제 (1)
  3. 2013.03.14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법
  4. 2013.03.11 한미 FTA는 현재 진행형
  5. 2013.03.07 아버지와 딸
  6. 2013.01.23 ‘청담동 앨리스’ 현실의 몽타주

“하늘 아래 녹슬지 않은 것이 없다!” 2003년 봄, 나는 대통령의 동북아비서관 자격으로 국회 건교위 의원들과 버스로 휴전선을 넘었다. 여의도에서 1시간 남짓, 일산에서는 불과 30분이었다. 군인들이 동원돼 공사하는 도로를 지나 인가가 나타났을 때 내 첫 느낌이 그랬다. 키 작고 얼굴 까만 아이들이 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 가슴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당시 공단부지는 그저 논과 밭이었다. 안내를 맡은 북한 담당자는 “개성공단을 건설한다고 우리 농민들이 밭도 갈지 않았는데 이게 뭡니까?”, 하소연했고, 민화협 관계자는 “삼성은 왜 안 들어온답니까? 재벌들이 들어온다면 남포까지 공단을 확대할 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은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6·15 남북 정상회담’의 역사적 산물이었다. 70년대에 머물러 있는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을 터, 한나라당 의원들도 점심상의 대동강 송어회 앞에서 개성공단 사업을 앞장서 추진하겠노라 호언했다. 2003년 여름 개성공단은 첫 삽을 떴고 2004년 말 1호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개성공단은 남북의 희망이 되었지만 2008년 이명박씨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모든 사업은 동결됐고 그예 영구 폐쇄를 걱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런 결과는 이명박 정부의 상호주의 논리에 이미 내재돼 있었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분명히 남북관계를 이렇게 볼 수 있다)에서 최선의 전략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TFT전략), 즉 상호주의가 맞다. 처음에는 협력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상대방이 협력하면 나도 협력하고 배반하면 배반으로 응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략의 취약점은 어떤 계기로 양쪽이 모두 배반하는 사태가 벌어지면 그 다음부터 영원히 상호 보복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하여 게임이론은 악순환을 막기 위해 어느 한쪽이 협력으로 돌아서야 한다고 가르친다(GTFT, 관대한 TFT). 아무래도 여유있고 잃을 게 더 많은 우리가 그래야 할 것이다.



나는 박근혜 정부의 개성공단 잠정 폐쇄를 비판할 생각이 없다. 우선 국민의 안전을 생각해야 하니 당연하고, 어쩌면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북한의 배반을 응징하기에 적당한 전략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협력의 이익을 늘리지 않는 한 북한은 남북관계를 치킨게임으로 인식해서 ‘미친 놈’ 역할을 계속할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적당한 시점에, 적절한 크기로 관대함을 보여서(GTFT), 서로 협력하는 것이야말로 북한도 살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들어야 한다(사슴사냥게임).



그것이 바로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북한 정권에 가장 큰 관대함은 정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이 존재하는 한 한국이 독자적으로 북한의 정권을 보장할 방법은 없을지도 모른다. 북한은 “우리 민족끼리”를 내팽개치고 미국과의 치킨게임에 몰두하고 있다. 하지만 ‘미친 놈’의 위협이 통하기에 워싱턴은 너무나 멀리 있다. 결국 우리 스스로 나서서 미국을 설득하고 중국이 동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남북이 먼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동시에 진행하는 수밖에 없다.


(경향DB)



더 길게 보면 한반도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중립 지대가 돼야 한다. 중국의 패권도, 미국의 패권도 원하지 않는 나라들의 동맹을 남북이 함께 주도해야 한다. 일본, 아세안, 러시아, 나아가서 인도도 동의할 것이다.중국의 패권에 휘둘리지 않고 동시에 미국도 견제해야 한다. 남북이 G2의 어느 한편에 서서 대리 충돌을 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과거 미국과 소련이 ‘제3세계’에 경쟁적으로 구애했던 것처럼 중국과 미국도 그렇게 만들 수 있다.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돼야 비로소 열리는 길이다. 선죽교를 건너면서 북한 관계자를 넌지시 떠봤다. “역시 군부 강경파가 문제죠?” “남한의 국회도 마찬가지잖아요?”가 그의 답이었다. 다시 어느 화창한 봄날에, 개성박물관에서 고려시대의 유물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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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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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서울에서도 창밖에 벚꽃이 분분히 날릴 텐데 각 부처 공무원들은 휴일의 책상머리 앞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부처의 창조경제, 예컨대 농림축산부의 창조경제는 뭐라고 할까? 십중팔구 과거에 해왔던 부처의 역점 사업을 창조경제라는 낱말로 새롭게 분칠하는 데 그칠 것이다.



진심으로 얘기하건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공무원들의 이런 행동은 정권을 넘어선 장기 정책이 실행되는 길이기도 하다. 특히 나는 환경부 공무원들이 전 정권의 ‘녹색성장’을 ‘창조경제’로 포장하기 바란다.



최근까지도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세계적인 저널에 성공사례로 오르내린다. 단언컨대 이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은 4대강 사업과 핵발전 확대로 사실상 “녹색 반혁명”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세계에 내민 보고서는 녹색성장을 “사회경제적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정의했으며, 이는 단순히 생태적 목표와 경제적 목표를 양립시키는 것을 넘어서 생태적 목표의 달성을 통해 사회변혁을 이루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의 커다란 한 축은 이미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4대강 사업과 핵발전을 뺀 나머지 녹색성장을 실천하면 된다. 예컨대 재생가능 분산형 발전과 스마트 그리드 사업은 에너지 패러다임의 대전환이며, 그 첫 발걸음으로 당장 탄소세(탄소배출량에 따라 부과하는 세금)를 부과할 수 있다. 물론 에너지 집중형 산업과 핵산업 등 기득권 세력의 반발이 크겠지만 창조적 미래를 위해 이들을 제압하는 것이야말로 아버지 박 대통령에게 배울 일이 아닌가? 아버지는 군화에 의존했지만 이제 딸은 시민을 믿어야 한다.


도대체 창조경제란 무엇인가? 각 부처 장관이나 비서관들의 설명이 가히 백화제방인데 이 또한 그리 비판받을 일은 아니다. 정보기술과 기존 산업의 융합이든, 제2의 벤처 붐이든, 아니면 문화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 아니 국민들의 반짝거리는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밟아 국회 합의까지 이끌어내야 한다. 무릇 패러다임의 변화, 시스템 차원의 변화는 그 목표가 미리 결정되어 있을 수 없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동에 따라 진화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래야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은 상상력과 창의력이 곧 경쟁력이 되는 시대”라고 강조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름지기 상상력과 창의력은 빈 공간(니치)에서 나온다. 질식할 것처럼 꽉 짜인 구조, 특히 승패가 이미 결정된 뻔한 경쟁 속에서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경향DB)

예컨대 현재의 재벌경제시스템 안에서는 벤처가 성공하기 어렵다. 20년 전쯤 삼성이 야심차게 실리콘 밸리처럼 일하는 젊은 부서를 만든 적이 있었지만 1년을 못 넘기고 문을 닫았다. 국민의 정부 시절 벤처 붐이 재벌개혁의 틈바구니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대통령이 약속한 경제민주화가 곧 창조경제의 전제조건이라는 얘기다.



더 나아가서 현재의 교육시스템 속에서는 상상력과 창의력이 결코 나올 수 없다. 입시경쟁은 아이들이 원래 가지고 있는 능력마저 체계적으로 말살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거의 암기력만으로 70만명의 등수를 매겨서 아이들이 갈 대학, 훗날 선택할 직업까지 결정하고 있다. “등수 없는 교육”을 교육부가 제시하지 못한다면 미래창조과학부에 맡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라도 대통령 명령으로 중·고교의 일제고사를 없앤다면 우리는 교육분야에서도 창조경제의 첫 발걸음을 떼는 것이다.


요컨대 진정 창조경제를 원한다면 정부는 기존의 모든 시스템에 빈 공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정부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해서 시민과 기업들이 그 공간에서 할 일을 창조적으로 찾도록 해야 한다. 오직 대통령만 할 수 있는 일도 있다. ‘수첩 속의 대한민국’은 결코 창조경제를 이룰 수 없다. 대통령이 수첩만 버려도 시민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용솟음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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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hristian louboutin sale 2013.04.16 09:1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쁨을 나눌 때 약속을 하지말고, 슬플때 대답을 하지 말고 분노에서 결정을 하지 말라.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했다. 그의 공언대로 “국민행복시대” “100% 대한민국”은 열릴 것인가? 우선 국민행복시대의 핵심어인 행복은 도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경제학이 행복에 관심을 가진 건 최근의 일이다. 피구 이래로 경제학은 행복을 소득(GDP)으로 대체했고 대부분의 정부 정책도 GDP 증가, 즉 성장에 맞춰져 있다. 이런 흐름에 최초로 파문을 일으킨 것이 저 유명한 ‘이스털린 역설(Easterlin Paradox)’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이스털린은 1974년 일정한 수준(대체로 1인당 GDP 1만5000달러에서 2만 달러 정도)을 지나면 국민소득의 증가가 그만큼의 행복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각종 행복 지표에서 하위권에 속해

 

이후 이 명제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대파는 주로 횡단면 분석과 단기 시계열에서 소득과 주관적 삶의 만족도가 비례한다는 사실을 찾아냈고, 이스털린 쪽에서는 장기 시계열에서 둘 사이에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나는 통계 해석에서도 이스털린 쪽을 지지하지만, 직관적으로도 소득이 늘어난다고 해서 꼭 그만큼 주관적 만족도, 즉 행복이 증가할 거라고 보지 않는다. 실제로 이스털린의 위 논문을 보면 한국은 평균 5% 남짓의 성장마다 0.4% 정도만 삶의 만족도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이스털린의 이 주장은 행복경제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미국의 ‘일반 사회조사’나 ‘세계 가치조사’ ‘유로 바로미터’ 등의 조사에는 “종합적으로 볼 때 당신은 요즘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당신의 최근 건강은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같은 주관적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 이런 주관적 행복도(삶의 만족도)와 소득이나 교육과 같은 객관적 지표를 합치면 ‘행복지수’를 구성할 수 있다. 어떤 지표를 집어넣고 얼마의 가중치를 곱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사뭇 다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국민은 별로 행복하지 않다. 스티글리츠 등의 보고서에 따라 주관적 행복 지표를 적극 반영한 OECD의 ‘더 나은 삶 지표’(Better Life Index·BLI)를 단순 가중평균하면 34개국 중 22위, 한성대 이내찬 교수 방식으로 가중치를 곱하면 32위이다. 특히 생태의 지속가능성, 사회적 자본 부문이 최하위이다. 세계 가치 조사에서는 37개국 중 28위(2007년), 영국 신경제재단의 국가별 행복지수에서는 178개국 중 102위, 보건연구원의 행복지수로는 36개국 중 25위이다.

 

특히 우리의 행복지수를 깎아내리는 요인은 소득 불평등, 젠더 불평등 따위 각종 불평등이다. 일반적으로 소득 분배가 잘 되어 빈곤가구가 적은 나라가 치안 상태와 성차별에서 나은 성과를 보인다. 한국은 1995년경부터 급격하게 소득 분배가 악화되고 있어서 이 점을 방치하면서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건 ‘나무에서 물고기 잡기’에 가깝다.

 

그럼 박근혜 정부의 정책은 국민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보고서 ‘국정 비전 및 국정 목표’, 그리고 ‘국정 과제’까지 훑어보았다. 훌륭하다. 성장률 대신 고용률을 내세운 것, 사회적 자본을 곳곳에서 강조한 점,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 쾌적하고 지속 가능한 환경, 신뢰받는 정부 등은 모두 행복을 늘리는 주요 요소이다.



(경향신문DB)


 

하지만 이런 훌륭한 목표들을 실행할 구체적인 정책은 좀처럼 찾기 힘들다. 10년 전에도 관료들이 하던 얘기들이 새로운 제목 아래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나아가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자활기업, 마을기업 등 공동체적인 경제 주체들을 활성화시키는 ‘두 번째 새마을 운동’을 제안할 것”이라는 대통령 측근의 발언에는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도 당시 우리의 지역공동체에 풍부하게 존재하던 사회적 자본, 예컨대 두레나 계, 각종 조합들을 말살했고 농협을 어용조직으로 만들었다. 이제 겨우 폐허 위에서 다시 꿈틀거리는 사회적 경제를 중앙 정부에서 하향식으로 조직하겠다니.

 

정부3.0도 마찬가지다. 일방향의 정부1.0, 쌍방향의 정부2.0을 넘어서 정보의 개방과 공유, 소통과 협력의 정부를 만들겠다는 참으로 아름다운 목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인수위부터 최근의 인사까지 한 일을 보면 박정희 시대의 정부1.0에도 못 미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데 답이 있는 게 아니다. 지난 선거의 쟁점이었던 경제 민주화(시장에서의 분배 개선), 보편 복지, 그리고 사회적 경제와 생태 혁신이 그 답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만 제대로 지켜도 ‘국민행복시대’의 문은 열릴 것이다. 





*이 글은 시사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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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이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발효 1주년을 맞는다. 2006년 2월,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에서 전격적으로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선언한 이래 참으로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 엄청난 ‘결단’을 내렸던 노무현 대통령은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방미 ‘선물’로 더 많은 쇠고기 수입을 약속했다가 거대한 촛불의 파도를 맞았다.

 

아직 정부가 제대로 구성되지 않아선지, 아니면 너무나 초라한 성적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는 별다른 행사나 홍보를 하지 않고 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2007년 정부가 한 EU FTA까지 추진하면서 미국과 EU와 동시에 발효되는 경우 생산성 증가까지 고려하면 실질 GDP가 무려 7.61%나 추가 상승할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것을 되돌아보면 가히 상전벽해라 할 만하다.

 

물론 관세청은 지난 1월, “한미 FTA 효과 등으로...(대미 수출이) 사상 최대 실적 경신, 전년 대비 4.1% 증가한 585억불 기록”이라는 자료를 언론에 뿌렸다. 한미 FTA가 발효되지 않았던 2011년 수출증가율 12.8%에서 3분의 1 토막이 났는데도 이런 문구를 뽑는 뇌구조는 어떻게 생긴 걸까.

 

또 관세청은 2012년 한국이 FTA를 맺은 나라들의 평균 수출 증가율이 2.1%라고 자랑했는데 최근 한국은행에 따르면 작년 전체 수출증가율은 3.8%였다. 한편 한EU FTA는 발효된 지 1년 6개월이 되었는데 작년의 EU 수출은 -11.4%라는 처참한 기록을 남겼다.

 

지금 한미 FTA나 한EU FTA가 우리나라의 수출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매년 10%에서 20%에 이르던 한국의 수출증가율이 이렇게 낮아진 건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와 연이어 유럽 재정위기를 맞은 세계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졌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이란 게 언제나 그렇듯 작년의 한심한 기록도 양대 FTA 때문에 그나마 선전한 결과라고 강변해도, 그 반대라고 증명할 길 또한 신통치 않다.

 

한미 FTA 발효 1주년 평가토론회 (경향신문DB)


문제는 한미 FTA가 이미 파산이 증명된 미국식 경제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이라는 데 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FTA 전략은 ‘경쟁적 자유화’였고 그것은 미국과 FTA를 맺는 국가에서 미국의 시장을 여는 대신, 지적재산권, 서비스, 투자분야에서 상대국의 법과 제도를 미국식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하여 한미 FTA 협상 이래 우리의 관련법은 63개나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수출입이 아니라 이런 법과 제도의 변화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있다. 불행하게도 우리 사회의 ‘미국화’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 이고 그 결과는 점점 더 증폭되어 나타날 것이다.

 

2007년부터 필자는 한미 FTA와 자발적 민영화가 결합될 경우 최악의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이명박 정부가 시도했던 인천공항 민영화, KTX 일부 구간 민영화, 그리고 가스공사 민영화를 새 정부가 계속 추진하고 여기에 미국자본이 참여할 경우(틀림없이 이들 공기업을 인수할 대기업은 미국 자본을 끌어들일 것이다), 그 때부터 저 악명 높은 투자자국가제소권(ISD)은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지금 진행 중인 론스타 소송은 우리의 미래를 그대로 보여준다. 한미 FTA가 발효된 상태가 아니라서 한-벨기에 투자협정에 근거를 두었지만 한 나라의 정책이 3명의 민간 통상전문가의 손에 좌자우지된다는 것이 그 본질이다(한미 FTA에 근거한다면 보복관세도 물릴 수 있게 된다). 즉 일단 규제가 완화되고 민영화되면 아무리 부작용이 심해도 다시 되돌아갈 길이 막혀 버리는 것이다.

 

제 아무리 많은 FTA가 발효된다 해도 수출은 작년보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노동분배율과 복지를 획기적으로 늘리지 않는 한, 경제성장률도 2% 안팎을 오갈 것이다. 대선 기간에 약속한 ‘맞춤형 복지’만으로도 재정은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하여 박근혜 대통령은 40조에서 50조원에 이르는 거대 공기업에 눈을 돌릴지도 모른다. 공기업을 민영화해서 효율성을 높이고 그 돈으로 복지를 늘릴 수 있다는 데 어찌 솔깃하지 않겠는가. 2007년 대선 때 그의 공약이 “줄푸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는 세운다)였다는 사실이 못내 불길하다. 7년이 지났어도 한미 FTA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 글은 PD저널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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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딸

정동칼럼 2013. 3. 7. 12:18

새벽 담배를 빼어 무는 내 야만성을 날카롭게 질책하던 바람 끝이 한결 무뎌져, 이젠 “부드럽다”는 느낌마저 드는 계절인데 국민들은 난데없는 칼바람을 맞았다. 칼칼한 목소리와 매서운 눈초리는 영락없이 ‘아버지 박통’이다. 하지만 난 “아”하면서 무릎을 쳤다.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 진정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느 새 내 안으로 스며든다. 내 경우엔 고 박현채 선생이 그랬다. 호방한 그에 비해 난 ‘쪼잔하기’ 이를 데 없고 그의 ‘민중’ 사랑은 흉내조차 낼 길이 없지만 어느 새 “민중이 원한다면 모든 걸 쓴다”는 그를 어설프게 따른 것인가, 온갖 주제에 변죽을 울리는 것도 그렇고 여전히 술 속에 사는 것도 그렇다. 


딸 박통의 “그”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아버지 박통이다. 나야 모방과 학습이라는 문화적 선택을 한 데 불과하지만 딸은 아비의 생물학적 유전자까지 물려 받았으니,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다수준 선택’의 훌륭한 표본이라 할 만하다. 이를테면 아버지 박통이 쿠데타 이후 깡패를 잡아들였다면 그 딸은 4대 사회악을 척결할 것을 다짐한다. 성폭력, 학교폭력, 불량식품, 가정파괴범들은 단단히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경향신문DB)


둘째는 “마을 길도 넓히고 초가집도 없앤” 새마을운동이다. 딸은 요즘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는 협동조합, 마을기업 만들기를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지목했다. 1970년대 말 새마음운동을 벌일 정도로 새마을운동을 흠모한 딸이니 그럴만도 하다.


문제는 세 번째, ‘경부고속도로’가 무엇이냐였는데 딸 박통의 담화는 바로 ‘미래창조과학부’의 ‘융합’이 답이라고 알려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최순홍 청와대 미래전략수석비서관은 “방송통신과 과학기술의 융합이 ICT분야의 경부고속도로”라고 정리했고 딸 박통은 ‘통섭’이라는 어려운 낱말을 주머니 속의 칼처럼 빼든다.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의 땅을 잇고 융합은 산업과 시장을 이어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다. 이런 웅장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방송장악”이라는 터무니없는 구실로 발목을 잡으니 분노할 만하다. 아비는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여당 대표에게 재떨이를 던지고 중앙정보부의 일개 직원이 중진 의원의 수염까지 뽑았지만 이젠 육군참모총장 출신 국정원장도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따지고 보면 기껏 유선방송 몇 개를 ‘미래부’로 이관하는 문제를 놓고 대통령이 담화까지 발표하는 게 이제는 이해가 갈 것이다.


존경하는 아버지를 따라 하는 건 결코 잘못이 아니고 실제로 인수위 보고서에 제시된 국정목표는 훌륭하다. 성장률 대신 고용률을 중시한다든가 물리적 자본 대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해야 한다는 주장, ‘꿈과 끼를 키우는 교육’, ‘쾌적하고 지속가능한 환경’, ‘신뢰받는 정부, 정부 3.0’이 그러하다. 통섭이나 융합에서 보이듯이 최근의 진화론적 학문 조류마저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책내용은 10년 전이나 별 다를 바가 없다. 목표는 진화했는데 수단은 여일하다. 더구나 대통령은 거의 자동으로 30~40년 전을 떠올릴 텐데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예컨대 아버지의 새마을운동은 초가집과 함께 사회적 경제도 말살했다. 해방 후 흔전만전하던 각종 조합이나 두레와 계 등 자생적 마을 조직은 모두 새마을운동에 편입돼 가뭇없이 사라졌는데 그것들이 바로 사회적 경제요, 사회적 자본이다. 서울시 등 각 지자체에서 현명하게 돕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위에서부터 돈벼락이나 행정지침을 맞는다면 소중한 희망의 싹을 딸이 또 한번 말살하는 비극이 되풀이될 것이다. 필요한 것은 신뢰와 협동의 네트워크지 새마을 경진대회가 아니다.


‘사회적 자본’이나 ‘융합’은 모두 아래로부터 자생적으로 ‘진화’하는 것이지 위에서부터 군대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필요한 것은 다양한 관련 기술과 산업의 클러스터지 그런 중앙 부처가 아니다. 정부의 개입은 부드러운 봄바람처럼 세심해야 한다. 일방통행의 정부 1.0, 쌍방향의 정부 2.0을 넘어 개방·공유·협력의 정부 3.0을 만들겠다는 것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목표다. 하지만 지금까지 딸이 보여준 행태는 아비의 정부 1.0에도 못 미치는 게 아닐까? 현재 정부의 어느 인사가 진화론이나 네크워크이론을 이해하고 있을까? 목표뿐 아니라 수단도 그에 걸맞게 진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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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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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라마광이다. 특히 토요일, 일요일엔 어지러운 술자리 때문에 놓친 드라마 재방송을 보느라 어린 딸과 신경전을 벌이다 참다못한 딸이 “아빠가 아줌마야?”, 소리를 지를 정도다. 그래선지 드라마 1~2회를 보면 그 성패를 알아맞히는 경지에 이르렀다.

 

SBS <청담동 앨리스>. 요즘 내가 연구원에서 공부하다 말고 밤 9시경부터 자꾸 시계를 들여다보고 때 맞춰 짐 챙기도록 하는 드라마다. 두 회를 남겨 놓고 스토리는 지지부진하고 ‘청담동’의 벽을 절감하도록 하는 촌철살인의 대사들도 이젠 식상해졌지만 마지막 회는 시청률 20% 언저리까지는 올라가지 않을까.

 

청담동은 말하자면, 새로운 귀족사회이다. 인화(김유리)의 말대로 디자인 대학을 차석으로 졸업해도 그들의 ‘안목’은 흉내 낼 수 없다. 인종이 다르다. 하지만 한국은 대단히 역동적인 사회였다. 농지개혁과 한국전쟁으로 지주계급이 완전히 몰락했고 교육은 신분상승의 통로였다. 이런 역동성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1990년대 중반이었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겨났고 이제 교육은 신분상승을 가로막는 벽이 됐다.

 

이때부터 세경(문근영)의 아버지 세대에게 부동산이나 주식 거품은 새로운 사회이동의 통로로 여겨졌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평생 흘린 땀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가계부채로 남았을 뿐이다. 이제 가난한 연인은 헤어지고 ‘청담동 앨리스’가 유일한 신분 상승의 길이 됐다.

 


▲ SBS <청담동 앨리스>

 


 

더구나 공부를 잘 못 했던 윤주가 보란 듯이 ‘청담동 며느리’가 되어 있으니 세경에겐 결코 못 올라갈 나무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겨우 두 세대에 걸쳐 이런 일이 한꺼번에 일어나다 보니 아직 체념에 이르지 못한 절망은 더욱 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다.

 

이 상황은 한국에만 특유한 건 아니다. 지난 30년간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다. 어느 나라나 수출경쟁력을 강조하면서 임금 인상을 억제했다. 그럼 수출이 잘 되지 않으면(모든 나라가 모두 무역흑자를 볼 방법은 없다) 국내수요가 줄어들어 경기침체에 빠지게 된다.

 

그 탈출구는 당시 모든 규제를 풀어버린 금융이 제공했다. 돈이 부족한 서민들에게 은행이 대출을 해 주고 신용카드를 뿌리면 된다. 저금리 상황, 그리고 저임금으로 남아도는 부자들의 돈은 집과 주식으로 향했다.

 

집값과 주가는 부풀어 오르고 이제 당장 빚을 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도 이 대열에 참여한다. 자산 가격이 오르면 괜히 부자가 된 것 같으니 소비가 늘어난다(‘자산효과’). 소비를 무한정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 ‘지위재’(position goods)가 개발됐다.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고가의 상품이 그것이며 바로 아르테미스 장띠엘 샤 회장의 전략이기도 하다. 무슨 무슨 ‘캐슬’이 등장하고 명품 열풍이 불었으며 커피자판기는 전문점으로 대체됐다.

 

이런 소비의 유토피아가 지속 가능할까. 자산 가격이 계속 오르고 빚이 영원히 늘 수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게 비극이고 그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나만은 가격이 떨어지기 전에 빠져나올 수 있다는 허망한 자기 기만극은 2008년 금융위기로 막을 내렸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데도 청년 일자리도 늘어나지 않고, 청담동 바깥에 사는 노인들은 허드렛일이라도 해야 한다. 우울한 장기침체는 10년 이상 갈지도 모른다.

 

<청담동 앨리스>는 과장되었을지언정 현실이다. “줄푸세”의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됐으니 정책이 이런 현실을 바꾸지도 못할 것이다. 청담동과 그 바깥은 점점 더 벌어지고 언론이 이런 개인주의/소비주의를 계속 부추기는 한(이 드라마의 간접광고를 보라), 이미 붕괴된 시스템 안에서 개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아마 <청담동 앨리스>는 순수한 사랑의 승리를 답으로 제시할 것이다. 절망적인 벽을 뛰어 넘는 사랑은 언제나 아름답다.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드라마 속 대리만족으로 허기를 채울 수는 없지 않은가. 청담동이 아닌 곳에서도 앨리스들이 서로 사랑하고 아웅다웅 싸움도 하면서 살아갈 길은 얼마든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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