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일(7일) 범국본 한미 FTA 긴급토론회에서 발표할 글입니다.



세계금융위기와 한미 FTA

정태인(경제평론가)

세계금융위기, G20와 한미 FTA



2008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미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라며 “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라며 은연 중 재협상까지 암시했다. 그렇다. 원래 청와대의 뜻대로 2006년 말에 비준까지 완료됐다면 2007년에 월스트리트산 파생상품이 물밀듯 들어왔을 것이고 미국발 경제위기의 쓰나미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삼켜버렸을 것이다. 미국에서 생긴 신상품은 네거티브 리스트 원칙에 의해 한국 시장에도 직수입된다. 물론 우리의 금융위원회가 시스템위기를 고려하여 규제를 할 수 있지만 미국 금융당국이 하지 않은 규제를 우리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그럴 의지도,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금융만 그런 게 아니다. 지난 4년간 되뇌고 또 목이 터져라 외친 것처럼 한미 FTA의 본질은 미국식 법과 제도를 한국에 이식하는 것이다. 미국의 FTA 전략을 성안한 로버트 졸릭(현 세계은행 부총재)의 말대로 미국의 FTA는 단순한 관세 협상이 아니라 상대 국가의 규제완화, 민영화를 되돌릴 수 없는 대세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한미 FTA 협상 개시 직후 발표된 미의회의 CRS 리포트에도 정확히 기술되어 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김현종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 FTA 청와대 브리핑(1호)에서 “한미 FTA는 미국의 선진적인 법과 제도를 받아 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국민참여당과 민주당 등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다고 선언한 정당들, 지난 지방선거에서 그의 죽음으로 엄청난 이익을 본 정치인들은 이 유지를 전혀 이행하지 않고 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우려대로 한미 FTA 찬성론자들이야말로 세계금융위기가 한미 FTA의 금융부문과 서비스 분야에 대해 의미하는 바를 꼼꼼히 짚어 보아야 한다.

미국의 그 선진적 법과 제도가 붕괴한 것이 세계금융위기이다. 즉 한미 FTA의 목표인 미국식 법과 제도의 수용, 특히 금융 산업의 미국식 자유화가 파국적 위기를 불러온 것이다. G20에서 금융분야 규제의 강화가 논의되는 것도 바로 미국식 금융제도가 어마어마한 파국을 불러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와 미국 재무부의 저항과 물타기로 우여곡절을 겪고 있지만 적어도 거시건전성 규제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식 때문이다. 나아가서 더 근본적인 개혁인 새로운 통화체제, 은행의 규모를 제한하는 은행세, 자본이동에 제약을 가하는 금융거래세를 채택할 것인지는 내년 파리 G20에서 가부간 결판이 날 것이다.

한미 FTA 금융분야에는 이런 모든 재규제, 또는 규제강화를 가로막는 조항들로 가득차 있다. 우선 한미 FTA 금융 분야의 각 조항은 양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금융거래에 적용된다. 13.1조 3항에 공적퇴직연금제도와 법정 사회보장제도는 예외로 하고 있지만 위의 “모든 활동 및 서비스를 공공기관 또는 금융기관과 경쟁하여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한도”에서는 금융챕터의 각 조항이 적용된다. 결국 “민간 의료 보험의 확대”처럼 정부가 자발적으로 민영화하는 만큼 미국 금융기관이 참여가 당연히 보장되고 이에 따라 한미 FTA의 적용대상이 넓어지는 것이다.

제13.4조(금융기관에 대한 시장 접근)는 G20의 논의 중 대마불사를 막기 위한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은행" 규제와 경기증폭성(procyclicality)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를 원천적으로 무력화할 수 있다. 즉 수량쿼터, 독점, 배타적 서비스 공급자, 또는 경제적 수요 심사의 요건과 관련없이 금융기관의 수, 거래 또는 자산의 총액, 금융서비스 영업 총수, 금융서비스의 총 산출량, 금융서비스 공급에 필요하고 직접 관련되는 자연인의 총수, 서비스 공급 수단에 대한 여하한 규제도 금지하고 있다. 원칙적으로 한미 FTA는 모든 수량규제를 금지하고 있다. 물론 G20에서 어떤 수준의 합의를 하느냐에 따라 “최소기준대우”의 해석이 달라지겠지만 이를 넘어서는 조치를 포함하여 사실상 모든 규제가 투자자 국가 제소권의 대상이 된다.

네가티브(예외목록) 방식 개방(p1023), 외환보유요건 추가 자유화, 예외(금융건정성 등을 목표로 한)의 제한(p990) 등도 모두 문제가 될 수 있다. 예컨대 현재 G20에서 광범하게 논의되고 있는 건전성 사유 규제의 경우 "... 건전성 사유로 조치를 채택하거나 유지하는 것이 금지되지 아니한다. 그러한 조치가 이 항에서 언급된 이 협정 상의 규정과 합치되지 아니 하는 경우, 이러한 조치는 그러한 규정상 당사국의 약속 또는 의무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여서는 아니된다"(p990)고 규정되어 있다. 이는 대표적인 ”예외의 제한“으로 투자자 국가제소권이 발동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특히 달러를 보유하고 있는 미국과 달리 외환시장이 협소한 한국의 경우 긴급한 자본통제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2002년 자본통제 조치가 무려 40건의 소송에 휘말린 것처럼 분쟁의 소지를 다분히 안고 있다.

정부는 금융분야의 일시적 세이프가드조치를 유보받은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자랑하지만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이 세이프가드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언세이프가드(unsafeguard, 불안한 보호)라고 할 만하다. 예컨대 이 조항에 의거하여 위기 시의 자본통제를 실시할 경우 “미합중국의 상업적. 경제적 또는 재정상의 이익에 대한 불필요한 손해를 피할 것”(부속서 11-사 송금 마항), 또 “모든 제한된 자산에 관하여 대한민국에서 시장수익율을 획득할 수 있는 투자자의 능력을 달리 방해하지 아니할 것”(부속서 11-사, 송금 라항)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1) 경상거래를 위한 지급 또는 송금 2) 외국인 직접투자와 연계된 지급 또는 송금”은 “일시적 세이프가드의 예외사항“이다. 이에 대해 미국의 산업무역자문위원회 보고서(ITAC 10)는 세이프가드와 ‘수용’ 상의 “미미한 제약”은 이러한 조항을 이용하여 투자자국가제소권(ISD)에 의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 금융분야에도 비합치조치 조항이 있다(제13.9조). 다항은 비합치조치의 개정이 그 직전에 존재했던 합치성을 감소시킬 수 없다는 규정이다. 즉 현재 한미 FTA에서 유보된 사항이라고 할지라도 그 이전보다 규제를 강화하는 경우 한미 FTA 위반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G20에서 논의되고 있는 규제강화는 현재 유보 사항이라고 할지라도 한미 FTA를 위반하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참여정부에서부터 추진됐던 자본시장통합법과 보험업법 개정을 완수했다. 자본통합법은 현재 금융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1999년의 그램-리치-브릴리 법(Gramm-Leach-Bliley Act)의 한국판이며 보험업법 개정은 미국식 의료제도를 확산하기 위한 것이다. 세계금융위기와 미국 의료법 개정의 실패를 보면서도 이러한 시대착오적 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이런 ‘자발적 민영화’와 한미 FTA가 만나게 되면 지난 지방선거에서 확인된 복지에 대한 열망은 헛된 꿈이 되고 만다.

G2와 한미 FTA

금년 봄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그 어느 누구도 이 사건이 전시작전권 전환 연기, 한미 FTA 비준으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하지 못했다. 더구나 북한의 연평도 포격으로 미국의 핵 항공모함 조지워싱턴호가 출동했고 한국은 이 비용도 치러야 한다.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젊디 젊은 우리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엉뚱하게 미국의 횡재로 이어지고 있다. 한미 FTA 재협상 결과는 우리가 이 비용을 치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 역시 세계금융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의 예측보다 빨리 미국과 중국 간 G2의 세계가 열렸다. 경제위기에 빠져 달러 패권이 빠른 속도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미국은 거의 모든 사안에서 중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대한 절상 압력이 여의치 않자 미국은 서울 G20 직전에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조치를 취했고, 그 결과 모두 절상압력을 받게 된 다른 모든 나라가 미국을 고립시켜 18:2가 된 것은 현재의 상황을 잘 보여 준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이 살 길은 중립을 표방하며 캐스팅 보우트를 쥐는 것 뿐이다. 그런데 경제와 외교안보 양 면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한 것은 앞으로 중국과 대립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물론 이럴 경우 남북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을 수 밖에 없다.

남북관계의 개선에서 얻을 것이 별로 없는 북한은 현재의 상황을 ‘치킨 게임’으로 인식하여 연평도 사건을 일으켰다. 치킨게임에서는 ‘미친 놈’이 이기기 때문이다. 연평도 사건은 “미친 놈”과 “바보”의 싸움을 보여주었다. 정부여당은 스스로 바보가 될 수 밖에 없도록 게임을 설계했다. “천안함 국제사기극”이 바보극의 제1막이었다면 연평도 사건은 제2막이다. 3막이 또 남았다. 그리고 한미 FTA 재협상 결과가 3막이다. 앞으로도 2년이나 남았으니 이 바보극은 끝없이 되풀이될 것이다.

한미 FTA 재협상의 결과

한미 FTA에서 한국 정부가 가장 성과를 거뒀다고 자랑하는 자동차 분야 역시 미국의 요구를 거의 100% 들어 준 것이었다. 3,000cc 미만 자동차의 2.5% 미국 관세 철폐를 얻어낸 대가로 한국이 약속한 것은 8%인 자동차 관세 인한 뿐 아니라 세제개편, 환경기준 완화, 자동차 표준협력반 설치, 그리고 스냅백 조항이다. 스냅백이란 “협정위반 또는 관련 이익을 무효화하거나 침해하고 심각하게 판매, 구입, 유통에 영향을 미친다고 판정할 경우” 6개월 내에 관세 장벽을 다시 세울 수 있도록 했으며 정부의 비위반제소도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이번 재협상은 정부가 자화자찬했던 3,000cc 이하 자동차에 대한 미국측 관세 2.5%의 즉각 철폐를 4년 후로 미뤘다. 뿐만 아니라 촛불이 겨우 막아 놓은 30개월 이상 쇠고기 수입도 자유화할 가능성이 높다. 2010년 2월에 발간된 미의회의 CRS 리포트((Cooper et. al., The Proposed U.S.-South Korea FTA : Provision and Implication)는 앞으로의 쇠고기 수출은 “한국 소비자의 신뢰 회복”과 “경제위기 속에서 한국 소비자의 구매력”에 달려 있다고 요약하고 있다. 즉 이미 민간 수출자율규제 형태로 되어 있는 현재 협약 내용을 별도로 고칠 필요는 없다. 소비자의 신뢰 회복을 이유로 더 풀라고 요구하면 그만이며 따라서 한국 정부 역시 규제를 푸는 방식(예컨대 곱창의 검사 방식)으로 미국의 요구를 조용히 수용할 것이다.

이제 야5당은 총력을 다해서 한미 FTA 비준을 막아야 한다. 2012년 대선까지 야5당 등 범야 진영은 외교안보, 통상분야의 대안을 마련해서 ‘정치연합’의 조건으로 삼아야 한다. 앞으로 20-30년간 미국과 중국이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한미 FTA 비준은 나라 전체를 크나큰 위기에 빠뜨리는 역사적 과오다.

현재 세계는 대전환을 맞고 있다. 아무리 협소하게 해석한다 해도 지난 30년간의 신자유주의 정책기조가 수정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한미 FTA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 특히 금융자유화가 파탄을 맞기 일보직전에 체결됐다. WTO+, 황금의 FTA로 불릴만큼 가장 지독한 금융자유화, 민영화를 담고 있다. 한미 FTA는 역사의 큰 흐름을 거스르는 초헌법적(supra constitutional) 정책일 뿐 아니라 미중 대립이라는 구도 속에서 남북관계를 최악으로 내몰 것이 틀림없다. 백보, 천보 양보해도 G20의 결과와 WTO체제의 수정이 이뤄질 때까지 만이라도 한미 FTA 비준을 보류해야 한다.

<참조> 주요 거시건전성 정책(규제) 수단

규제 영역

규제 수단

주요 내용

비 고

자본

규제

경기대항적 완충자본

(capital buffer)

- 경기호황시 추가자본을 적립토록 하여 과도한 신용확장을 억제시키고 금융위기시 동 자본을 손실보존, 대출재원 등으로 사용

G20,BIS 논의

레버리지규제

- 위험가중자기자본규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위험가중치를 부여하지 않은 자기자본(TierI) 대비 레버리지 총량을 규제(난외거래 포함)

시스템리스크 추가 자본규제

(system risk surcharge)

-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에 대해 추가적인 자기자본 적립의무를 부과

동태적 충당금규제

- 미래의 예상되는 손실에 대해 충당금 적립의무를 부과함으로써 과도한 신용확장을 억제

신용

규제

LTV 규제

- 특정대출유형에 따라 담보인정비율(LTV), 담보가치할인율(haircut ratio), 담보요구(margin call) 등을 신축적으로 부과함으로써 주택담보대출 등의 과도한 확장을 억제

각국의 전통적

규제수단

DTI 규제

- 부동산대출 등 특정대출에 소득대비 대출한도를 부과함으로써 주택담보대출의 과도한 확장을 억제

위험가중치

부과

- 특정대출에 위험가중치를 다르게 부여하여 대출한도 등을 설정하거나 규제자본을 부과함으로써 특정부문의 과도한 신용확대를 억제

유동성 / 시장

위험

LCR(Liquidity Coverage ratio)

- 위기시 순현금유출액 만큼 자산의 가치손실이 적은 상태로 쉽게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현금, 중앙은행예치금, 국채 등)을 보유하도록 규제

G20,BIS 논의

NSFR(Net Stable Funding Ratio)

- 필요시 자금조달액 만큼 안정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자금조달 금액을 사전에 충분히 마련토록 규제

외화대출 규제

- 과도한 외화자금의 유입 및 국내 신용의 확산을 억제하기 위해 외화대출의 용도를 해외사용 등으로 규제

신흥시장국의

외환건전성 규제

통화불일치 규제

- 통화불일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외화차입, 대외자산 운용 등을 규제

외환포지션 규제

- 환율변동의 시장위험을 제거하기 위해 순외화자산의 매입 또는 매도초과가 과도하게 발생하지 않도록 외환포지션을 규제

자료 : CGFS(2010)을 일부 수정 보완


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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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정말... 보고 있노라니 미치겠군요. 2010.12.08 22:1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걸 국민들 대다수가 이해는 커녕,
    알기도 귀찮아하고 있는 현상황이니 참...

    그나저나, 쥐박이를 봐선,
    미제와 쪽국의 이중간첩노릇을 하고 있었구만요!

    요즘 와서 절실히...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뭐, 거기서 우선이라면야... 미제 간첩이 우선이었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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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이번 주 피디저널에 실릴 예정입니다.


미친놈과 바보의 게임

정태인(경제평론가)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것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미친 짓’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미친 짓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때도 있다. “치킨 게임”(또는 “매-비둘기 게임”, “눈더미게임”)이라면 그렇다.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서 짐(제임스 딘)과 버즈는 주디(나탈리 우드) 앞에서 자신의 용감을 증명하기 위해 절벽을 향해 나란히 질주한다. 아이들에게 그 짓이 얼마나 절박한지 몰라도 어른, 또는 제3자가 보면 분명 미친 짓이다. 만일 똑같은 조건이라면 잃을 게 많은 쪽이 먼저 핸들을 틀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의 연평도 포격 관련 현황보고를 받기 위해 지휘통제실로 들어서고 있다.


이 게임에서 이기려면 진짜 미친 놈이거나 상대방이 “저 미친 놈”이라고 혀를 내두르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70년대의 핵무기 경쟁 때 닉슨은 “미친 놈”이라고 욕을 먹자 “미친 놈으로 보이도록 하는 게 내 전략”이라고 대답했다.
군비 경쟁, 나아가서 무력 경쟁을 한다면 거의 100% 한국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잃을 것이 많다. 전쟁 개시와 함께 발사된 북한의 포탄에 서울 인구 100만명 정도는 희생될 것이다.

북한이 초토화되고 김정일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이것은 이긴 게임이 아니다. 설령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이런 게임을 만들어 놓았다면 당연히 ‘미친 놈’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주장이 그러하다.

사춘기 철부지 정도의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는 조중동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한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이 이런 게임을 유도했을까?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표방한 대북정책의 지침은 ‘상호주의의 원칙’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들의 대북정책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정말 그랬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악셀로드의 유명한 실험이 증명했듯이 이 게임에서 최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이다.

상대방이 직전에 한 행동을 따라 해야 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이긴다기보다 지지 않는다. 일단 선의(협력)로 시작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우리도 배반(협력의 중지 또는 무력경쟁)하는 것이다.

단 배반과 대결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양쪽 다 패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어느 순간 다시 협력을 선택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전술의 반전은 여유 있는 쪽에서 결행할 것이다. 지속적 대결에서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여당은 “선에는 선”을 잊어버린 듯 오로지 배반을 선택했다. 이제 협력으로 얻을 게 별로 없는 북한은 ‘미친 짓’을 선택한다. 북한은 현재의 상황을 치킨 게임으로 인식한 것이다. ‘미친 짓’ 중 가장 비용이 적은 선택이 핵개발이다. 연평도 포격은 ‘미친 짓’ 좀 봐달라는 ‘미친 짓’이다.

죄수의 딜레마보다 더 나은 것이 사슴사냥게임(Stag-Hunt game, 또는 Assuarance game)이다. 이 경우는 협력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한번 좋은 균형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배반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게임을 설계해서 양쪽 모두 배반할 이유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대북정책의 뼈대가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저비스(R. Jervis)는 저 유명한 "안보 딜레마 하에서의 협력“이라는 논문에서 국제정치란 안보딜레마 등의 제약이 걸린 사슴사냥게임이라고 갈파했다)

우리를 둘러싼 국제상황을 보아도 이런 정책기조는 불가피하다. 이미 G20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적어도 앞으로 몇 십년은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고 또 대결할 것이다.
우리가 선택할 길은 엄정 중립이어야 한다. G2의 이 대립은, 우리가 어떤 게임을 선택한다 해도 그 뒤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절대적 환경이다. 북한의 배반을 응징하기 위해 봉쇄정책이나 군비경쟁을 강화한다 해도 중국이 존재하는 한 별 효과가 없다. 결국 죄수의 딜레마게임이나 치킨 게임으로는 상황만 악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더더욱 우리는 협력 게임을 선택해야 한다. 양쪽이 찢어지면 미중 대립의 앞잡이가 되고 결국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연평도 사건은 “미친 놈”과 “바보”의 싸움을 보여주었다. 정부여당은 스스로 바보가 될 수 밖에 없도록 게임을 설계했다.

내 보기에 “천안함 국제사기극”이 바보극의 제1막이었다면 연평도 사건은 제2막이다. 3막이 또 남았다. 재협상에 들어갔다는 한미 FTA가 그것이다. 언제 이 바보극은 끝이 날 것인가? 아직도 2년이나 남았다.


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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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재현 2010.12.01 16:0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후와! 이런 거 언제 개설했어? 좀 알려주지...근데 윗글 링크 안되네.

  2. 모지리 2010.12.07 17:3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앗 형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왕림해 주시다니... 음.. 이 글은 피디저널 거라서 링크를 안 했나? 하드림이나 피디저널에 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G20에서 “역사에서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중요한 역사적 일”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맞다. 나는 10월 22일 “이명박대통령의 역사적 사명”이란 글에서 하지 말아야 할 일과 해야 할 일을 썼다.

“우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미중간의 환율전쟁에 섣불리 개입해서는 안된다. 유독 중국의 외환시장 개입만 환율조작이라고 말하려 한다면, 전 세계 통화를 모두 절상시킬 것이 틀림없는 미국의 달러 증발(QE)은 왜 환율조작이 아닌지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인민폐(위앤화)를 20% 내지 40% 절상한다고 해서 미국의 경상적자가 해소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무려 15년에 걸친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가 과연 미국의 경상적자를 줄였는지, 오바마 대통령에게 물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환율문제를 해결하겠노라 공언했고, 결과는 물론 실패였다.



<그림1> 중국과 일본의 대미국 무역수지
MaKinnon, Schnabl, The Case for Stabilizing China's Excange Rate, 
China and World Economy, 2009에서 재인용


위 그림을 보자. 미국이 플라자협정부터 약 15년간 엔화를 100% 이상 급속하게 절상시키는 등 일본 때리기를 했지만 일본에 대한 무역수지는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미국 GDP의 0.5%, 즉 1000억 달러 가까운 수준이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대중국 적자는 눈덩이처럼 부풀어 올랐다.

2009년 세인트루이스 연방제도은행(우리의 한국은행이라고 보면 된다)에 실린 논문은 이 그림을 계량경제학으로 실증했다(Fratzscher, Juvenal, Sarno, "Asset Prices, Exchange rates and Current Account", 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 2009)



표에서 보듯이 환율쇼크는 미국 무역적자의 9% 정도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주식과 부동산 쇼크(버블)은 거의 30%를 차지한다. 조금 단순화해서 얘기한다면 주가나 부동산가격의 상승이 미국의 소비와 건설투자를 능력 이상으로 늘렸고 이것이 무역수지 적자의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글 “오바마의 전쟁”에서 썼듯이) 국내에서 곤경을 회피하기 위해 통상전쟁을 시작했다. 오바마대통령은 한국에 오기 전에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채권을 무한정 사들이는 양적 완화 정책(Quantitative Easing)을 단행했다.
달러가 넘쳐나면 물론 달러 값이 떨어지고 전 세계 통화는 절상될 것이다. 사실 이건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가 핵폭탄과 같은 최후의 위협용 무기를 사용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오바마는 G20에서 18:2의 상황을 자초했다. 미국 외의 한 나라가 한국이었다.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사상 초유의 비용을 치르고 우리가 배운 교훈은 이제 국내외 자본이동의 속도를 늦추고 금융자본의 몸집을 규제해야 하며 환율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세가지 과제의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금융거래세와 은행세를 부과하여 자본의 이동속도와 몸집, 그리고 모험적 행동을 규제하고 한 나라의 이익에 좌우되지 않는 새로운 국제통화체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같은 글)

이명박 대통령은 이런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한국이 추가한 “금융안정망”과 “개발” 의제는 말의 성찬에 불과했다. 이 과제들은 내년에 열릴 파리 G20에서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제기할 예정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을 많이 저지르곤 하지만 사르코지는 드골의 후예임에 틀림없다.

결국 내년이 G20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이미 2009년에 SDR(IMF의 특별인출권)을 기축통화로 삼자고 주장한 바 있는 중국과 EU가 연합해서 미국을 몰아 붙일 것이다. 이제 한국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 물론 한국도 새로운 통화체제가 훨씬 더 이익이다. 어마어마한 외환을 보유하고도 통화위기를 걱정하는 일이 없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일한 해결책?

사실 글로벌 불균형과 환율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4년의 브레튼우즈 협상, 그리고 1970년대말 달러 위기 때도 어떤 한 나라의 통화가 아닌 제3의 통화로 기축통화를 삼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타협점은 없는가? 있다. 브레튼우즈 때 케인즈가 제시한 국제청산동맹은 국제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안을 담고 있었다. 즉 일정 한도 이상의 흑자가 쌓인 나라도 벌금을 물도록 해서 현재와 같이 외환보유고를 무한히 쌓을 유인을 줄이려고 했다. 물론 케인즈의 생각은 당시 거대 적자국이었던 영국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고 흑자국이었던 미국이 반대했다.

그러나 1970년대말 달러 위기 때는 상황이 달라졌고, 당시 미국은 국제수지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안이 붙는다면 새로운 통화체제를 받아들이겠다고 한 바 있다. 지금 한국이 미국을 대변한 국제수지 조정 방안이 바로 그 맥락이다. 그렇다면 프랑스나 중국의 새로운 통화체제에 케인스의 안을 삽입하면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이 동시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미국이 달러 기축통화를 포기하는 것은 오바마 대통령의 장송곡이 되고 말테니 정치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미국은 아직 1940년대의 영국만큼 이빨빠진 호랑이 상태가 되지는 않았다.

한국이 어느 나라에 제일 많이 수출할까? 중국이다. 15% 안팎에 불과한 미국의 두 배 가깝다. 중국과 다른 아시아 국가를 합하면 50%가 넘는다.
그런데 우리 정부와 경제학자들의 미국의존도는 150%가 넘는다. 이렇게 현실감각, 또는 균형감각이 없는 사람들을 찾기란 좀체 어렵다. 병자호란 때도 명나라 편을 들던 조선의 선비들이 여기에 가까울까?





한미 FTA는?

한미 FTA 재협상을 타결하려던 양국 대통령의 계획은 무산됐다. 모든 게 비밀이니 진상을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쇠고기가 문제였을 것이고 자동차 분야에 대한 양보도 문서로 남기자는 미국의 요구 때문에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촛불이 이번에도 한미 FTA를 막아낸 것이다.

G20 이전 일주일 동안 서강대에서 열렸던 “민중대회”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한미 FTA의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는 세계금융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개혁 논의와도 부딪힌다. 금융거래세나 은행세 모두 투자자 국가제소권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네거티브 방식 개방은 지금과 같은 금융위기가 한국에서도 언제나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금융위기는 한미 FTA의 철저한 재검토를 요구하고 있다. 위기 상황에 비춰서 한미 FTA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소리를 고 노무현 대통령 빼곤 아무도 하지 않는 것도 참으로 기이하다.

이제 이명박대통령은 미국에 마지막 피 한방울을 소리 없이 넘기는 방안을 고민할 것이다. 한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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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gjdk75 2010.11.17 11:4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뻔한 결론이라는 말이 참 와닿습니다.


민족적 생활양식의 재해석과 풀뿌리 지역공동체의 복원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농업 정책에 관한 구상으로부터 출발했다. 
물론 이것은 60년대 한국경제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거의 모든 사회적 비용을 농민이 부담했기 때문이다. 박현채는 협업농과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농업이 GDP의 3%를 차지하는 현재에 이르러 이 주장은 새로운 차원에서 귀기울일 만하다. 

한마디로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야말로 경제성장과 복지, 일거리, 미래산업의 요람이다. 한국경제의 새로운 성장동력과 동시에 민주주의의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료시설, 요양시설, 공공도서관 등 지역 인프라의 구축은, 동시에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세심한 돌봄노동을 필요로 한다. 공공의료의 30%에 달하는 지역거점 공공의료시설, 공공보육시설, 공공도서관 및 문화센터, 재래시장 공영개발, 소규모 도심지 공원 등의 설립과 운영을 주민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은 복지-교육-문화 서비스의 수급을 맞추는 최선의 방법이다.

풀뿌리 공동체는 또한 태양열, 풍력 등 재생에너지 산업의 근거지이다. 2020년까지 에너지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한 20% 감축하고 에너지 공급을 생태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에너지 가격 시스템의 개혁, 환경규제의 강화로 재생에너지산업과 친환경산업을 미래의 산업으로 만드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가장 효율적이다.




농촌의 풀뿌리 공동체는 안전한 먹을 거리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의 1차산업으로서의 농업 없애기에 맞서 대농, 기계농, 화학농 육성을 폐기하고 2020년까지 가족농의 협업에 의해 유기농업 비중을 40%까지 늘릴 것이다. 농업생산, 농협과 생협에 의한 유통 개혁, 공공급식개혁으로 풀뿌리 공동체부터 먹을거리 지역체계(로컬푸드시스템)를 구축한다. 
생태마을은 도시민의 농업 체험과 지역 역사문화유적, 지역 자연환경의 보존을 통해서 ‘정겨운 관광’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호텔, 골프장, 카지노라는 이명박 정부의 환경파괴적 관광과는 정반대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풀뿌리 공동체를 통해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 풀뿌리 지역공동체의 사회경제(social economy)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지역 주민이다. 농민과 노동자, 서민금융 대표, 지역 상인, 지역의 기업인 등이 지역공동체의 지배구조를 구성하여, 건설회사, 지역언론, 지역관료로 구성된 토호연합을 대체해야 한다. 
지역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지역의 여러 경제활동을 스스로 계획하고 실행하여 우리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 복지가 동시에 이뤄지는 것임을 증명할 것이다.

요컨대 글로벌 시대의 개방된 민족경제는 가장 밑의 층위에 풀뿌리 경제가 있다. 이 층위에서의 행동원리는 호혜성(reciprocity)이다. 군단위 지역경제의 각종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기타 시민사회단체들이 그 주체이다. 
지역의 사회적 서비스, 안전한 먹을 거리 생산, 재생에너지 생산등이 그 대상으로 현재 GDP 중 차지하는 비중 0%에서 앞으로 10년간 약 20%까지 늘려나갈 수 있다. 

이 층위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성장과 생명복지(lifare)의 핵심이다.

그 위에는 공공성의 층위가 있다. 

네트워크 산업, 그리고 국가 차원의 의료, 교육, 주거 정책이 여기에 해당한다. 또한 시스템 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언론과 금융도 공공성 영역이다. 이 층위에서의 행동원리는 재분배(redistribution)이다.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모든 사람의 능력이 만개할 기회를 제공한다. 조세부담율과 사회정책지출이 OECD 최하위에 속하는 나라에서 이 층위는 앞으로 두배 가까이 늘어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장이 올라선다. 이 층위의 행동원리는 경쟁이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공정성(fairness)가 강조되어야 한다. 이 층위에서 국가의 역할은 경쟁의 규칙의 제정과 감독, R&D투자, 클러스터의 형성 등이다. 넓은 의미의 외부성이 국가 정책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들 세 가지 층위가 고유의 행동원리와 함께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 조화를 이룰 때 내수가 성장할 것이며 글로벌 시대에도 안정적인 ‘민족경제’를 형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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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 긴 글이라 원문을 첨부했습니다.

스티글리츠는 뭐라고 했을까? G20의 쟁점을 중심으로

- UN 스티글리츠 보고서 서평

정태인(경제평론가)

# 2003년 1월 서울 하이야트 호텔 라운지

투명한 푸른눈이 반짝거린다. 스티글리츠교수는 신나는 일을 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정우교수(당시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의 수첩에 명단을 적어 나갔다. 유명 학자들 사이에 소로스의 이름도 끼었다. 지금은 소로스가 대단한 혜안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나에겐 잉글란드 은행을 물먹인 투기꾼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내 눈 속의 의아함을 읽었다는 듯, “놀랄만한 상상력을 가지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는 사람이지요”하고 말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가 바로 내 옆에 앉아 있다. 아니 그런 명성보다는, 모든 걸 잃어버린 심정으로 버클리와 캠브리지를 떠돌 때, 나에게 다시 경제학에 희망을 걸게 한 사람이기에 더 반가웠다. 그가 한국 대통령의 해외경제자문단장을 맡기로 했다. 그가 지금 적고 있는 이름들은 자문단의 위원들이다. 미국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워회(CEA)보다도 화려하면 화려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이름들이다.

이틀 전 스티글리츠교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를 만났다. 동석했던 이정우교수에 따르면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다고 한다. “싼 게 비지떡이다” “벌거벗은 임금님” 스티글리츠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을 때(2001), 내가 한 인터넷 신문에 최대한 쉽게 쓴 스티글리츠 이론 소개를 당선자는 들고 있었다. 당선자가 해외자문단장을 제안하자 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즉각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한국을 잘 알았고 또 좋아 했다.

“동아시아의 기적”(1994)은 그가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부총재)로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성장 비결을 정리한 책이다. 그는 외환위기 때 IMF의 정책, 특히 고금리 정책을 맹비난했다. 비슷한 국제기구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그는 클린튼의 경제자문위원장 시절부터 미국이 한국의 금융시장 개방을 강요하는 데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당시에도 그의 정반대에는 오바마 대통령의 경제자문위원장인 서머스교수가 서 있었다. 스티글리츠는 강요된 금융개방으로 한국이 위기를 맞았고 미국은 IMF를 통해 또 한번 한국을 죽이고 있다고 했다.

요즘 말로 하면 경기증폭적(pro-cyclical, 대부분 ‘경기순응적’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의미나 어감으로 봐서 ‘경기증폭적’으로 번역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counter-cyclical도 ‘경기역행적’보다는 ‘경기완화적’이 낫겠다)정책, 즉 경제위기에 고금리 처방을 써서 경기를 더 악화시키는 잘못된 정책을 쓰고 있다고 비판했다. IMF와 월스트리트, 그리고 미국 재무성, 즉 워싱턴 컨센서스의 3주체를 맹비난하던 그는 결국 세계은행 부총재직을 사임해야 했다. 이번 금융위기가 터지자 그는 곧바로 “위선”이라는 칼럼을 썼다. 한국에는 고금리를 강요했던 미국이 자기 나라의 금리를 제로로 낮추는 것이야말로 위선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는 한 책에서 한국이 바라 봐야 할 곳이 있다면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모델이지 결코 미국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이제 소개할 이 보고서에도 나오지만 “FTA나 GATS(WTO의 일반서비스협정)를 통한 금융개방을 받아 들여서는 안된다”고 했다. 또 다른 책에서는 자신이 자문위원장 시절로 있던 시절에 통과된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에 투자자 국가 제소권이 있었다는 걸 그 때 알았다면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했다.

그가 실제로 참여정부의 해외자문단장이 되었다면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중에 이정우교수에게 들은 바로는 청와대 내부(그리고 재경부)에서 (이번 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가 싫어할 것”이라는 이유로 흐지부지됐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알리고 사과하는 편지를 보낼 시점도 놓쳐 버렸다. 만에 하나 다시 그를 만나게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 스티글리츠 보고서

이 책은 스티글리츠위원회가 펴냈다. 2008년 리만브러더스 파산으로 세계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UN은 스티글리츠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문가 위원회를 소집했다. 나도 이름을 아는 오캄포나 굿하트 등 경제학자들 뿐 아니라 각국 중앙은행 총재나 관료, 그리고 기업가들이 참여했다. 2009년 6월 UN의 192개국은 만장일치로 ‘스티글리츠 보고서’를 채택했다. 그해 9월 영문판이 완성됐고 이제 한국어 번역본이 나온 것이다. 나는 우선 역자(박형준 진보금융네트워크 상임연구위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나 스스로 번역하고 싶었지만 이러 저러한 이유, 또 게으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서울 G20 전에 번역이 나왔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아직 세계는 위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G20이 계속 열리면서도 뚜렷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한편으론 패닉상태에서 벗어나 각자 살 길을 찾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직도 함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반 국민이, 아니 제 아무리 경제학자라고 해도 100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이런 거대한 사태를 꿰뚫어 보고 방향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앞으로도 10년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혼돈의 시기에 이 책은 훌륭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 책을 스티글리츠 혼자 쓴 것은 아니다. 네 개의 분과에서 치열한 토론을 거쳐 보고서는 완성됐다. 그러나 그 옛날 “동아시아의 기적”이 그랬듯 “스티글리츠 보고서”도 그의 체취를 아주 짙게 풍기고 있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또는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 우리는 시장만능론이라고 흔히 부른다)의 파탄”을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효율적 자본시장 이론에 입각한 금융자본자유화, 증권화가 불러온 파탄이다. 미국 재무성과 IMF 등 국제기구에 가득찬 경제학자와 관료들이 빚어낸 명백한 “인재”이다.

스티글리츠가 다른 책 곳곳에서도 강조하듯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이유인 정보경제학으로 정보의 불완전성, 비대칭성으로 가득찬 시장은 언제나 실패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세상은 외부성, 그리고 유사외부성으로 가득차 있으며 그래서 국가의 규제는 필수적이다.

이미 “세계화와 그 불만”으로 시작된 세계화 시리즈에서 논파했듯이 금융세계화는 ‘시장실패의 세계화’를 의미한다. 이번의 세계금융위기는 그의 주장을 여실히 증명했다. 시장에서 기업은 파산하는 것으로 자신의 실패를 책임진다고 하지만 거대 금융회사나 기업이 파산하면 시스템 위기로 이어진다. 세계화한 외부성(global externality)을 교정하고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를 공급하는 것이 이번 위기에 대한 해법이다. 또한 위기 시의 모든 정책은 케인스의 주장대로 총수요의 관점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글로벌 총수요가 증가할 수 있도록 정책을 짜야 한다는 것이 이 보고서의 또 하나의 원칙이다.

그러나 글로벌 규제와 글로벌 공공재의 공급은 한 나라가 해결할 수 없다. 세계 정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IMF와 같은 국제기구가 존재하긴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외부성을 무시하고 공공재를 부정한다. 오로지 시장에 의한 해결만이 올바르다는 것이다. 이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문장처럼 “세계의 (정치 등) 조정기구가 만들어지기 전에 금융과 경제가 먼저 세계화했다”. UN 192개국이 참여하고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새로운 국제기구, “세계경제협력이사회”(GECC, Global Economic Coordination Council)가 만들어져야 한다.

IMF가 제 역할을 하려면 미국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지배구조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경제철학을 갖출 수 있도록 철저한 개혁을 해야 한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이나 최빈국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그리고 그럴 의사도 전혀 없는 G20은 그저 아시아와 중동 몇몇 국가의 IMF 쿼터를 5%-6%로 늘리는 것을 ‘지배구조의 개혁’이라고 부르고 있다.

G20의 논의에서 발전의 면모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가장 큰 발전은 경기증폭성에 대한 인식이다. 그동안 주류 경제학은 민스키와 그 제자들(주로 포스트 케인지언)의 주장을 간단히 무시했다. 첫째, 버블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으며, 둘째 존재한다고 해도 터질 때까지는 알 수 없으며, 셋째 사전에 터뜨리는 것보다는 터진 뒤 수습하는 쪽이 비용이 덜 든다는 것이 주류경제학자들이나 국제기구 학자들의 주장이었다. 이런 얘기는 우리 귀에도 익숙한데 우리나라의 부동산 공급론자, 그리고 재경부나 국토부,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산 경제학자들이 줄곧, 지금까지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 와서 이런 주장을 강하게 내뱉을 간 큰 경제학자는 별로 없지만(속으론 시간이 지나기만 기다리겠지만)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최근에 쓴 글에서 부동산 버블은 저금리등 금융당국의 잘못된 정책 때문이 아니라 다양한 모기지제도 때문이었다고 변명하고 있다. 스티글리츠는 경제학이 이런 상태에 머무는 한, 그리고 이 책이 제시하는 진정한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위기는 또 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경기증폭성은 여러 측면에서 겹치고 또 겹쳐졌다.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하면 경기는 증폭된다. 지금 한국이 그렇다. 2009년에 엄청나게 풀린 돈들이 그래도 경제상황이 나은 동아시아로 몰려들고 있다. 또 다시 주가는 오르고 사람들은 낙관에 빠진다. 그러나 우리가 2008년 겨울에 이미 경험한 것처럼 이 돈이 어떤 이유로든 일시에 빠져나가면 주가는 급락하고 더 나쁜 경우 또 다시 달러 걱정에 시달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현재의 자본적정성 기준 등 건전성 규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은행이 담보로 잡은 자산의 가치가 올라가면 대출여력이 늘어난다. 이른바 레버리지가 한없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반대 방향으로 수축(디레버리지)할 수 밖에 없다. 신용평가도 여기에 한 몫을 한다. 막강한 힘을 가진 국제신용평가사들이 사전 예측으로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가 급락한 뒤에야 평가를 한꺼번에 몇 등급씩 내리니 경기는 더 빠른 속도로 움츠려든다.

이제 IMF도, 그리고 G20도 이 점은 인정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고 있다. 예컨대 개별 금융기관의 건전성을 확보하기 감독 정책이 오히려 경기증폭성을 강화하므로 호황기에는 높은 자기자본비율을 적용하고 불황기에는 낮은 자기자본비율을 적용하는 완충자본을 설정하고, 시장가격으로 자산을 평가하면 호황기에는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과대평가하고 불황기에는 과소평가하게 되므로 공정가격개념을 도입하고 직접적으로 레버리지 비율을 규제하게 될 것이다. 또한 금융은 외부성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BIS 규제가 양호한 금융기관도 파산할 수 있다. 이러한 전이 위험을 막기 위해 최저 자기자본비율을 상향 조정하고 후순위채 등을 제외한 양질의 자본(Core Tier1 Capital)을 자기자본으로 규제하고 단기적 유동성 관리 평가기준으로 유동성 커버리지 비율을, 장기적 유동성 관리 평가기준으로 순안정자금 조달비율을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도 시장가격평가를 제외하고 대체로 같은 방향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들과 스티글리츠보고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의 이동에 관한 견해에서 나타난다. 보고서는 외환가변유치제나 무이자 증거금의 부과 등 자본의 이동, 특히 자본의 유입을 제한하는 정책(이른바 “과속방지턱”)을 각국의 특성에 맞게 신축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개발도상국의 경우 이런 정책공간의 확보는 대단히 중요하다. 보고서는 자본이동의 속도를 얼마간 늦출 수 있는 금융거래세(토빈세와 케인스세)도 보완적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 하나의 차이는 대형금융기관에 대한 것이다. “너무 커서 실패할 수 없는 too big to fail" 상황, 즉 대마불사에 이른 금융기관은 당연히 도덕적 해이에 빠진다.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글로벌 외부성을 특히 강조한다. 이들 기관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해서 살려 놓으면 세계의 돈은 다시 미국으로 향한다. 바로 2008년말 상황이다. 건실한 정책을 사용하던 개발도상국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피해를 입는다. 따라서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각 금융업무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고 특히 예금보험이라는 국가보증을 받는 은행에 대해서는 위험 감수 행위를 엄격하게 규제해야 하며 규모에 따라 규제는 더 강해져야 한다. 보고서는 규제의 범위가 포괄적이고 일관된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CDS(신용부도스왑)는 파생상품이지만 사실상 보험의 기능을 하므로 보험감독위원회에서도 규제를 해야 한다.

G20은 이 문제를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금융기관”의 문제로 취급한다. 2010년 1월 오바마 대통령은 금융회사의 대형화와 위험 투자를 직접 규제하는 볼커 룰을 제안했다. 그러나 입법화 과정(“도드-프랭크법”)에서 시스템정리기금(Systemic Dissolution Fund)은 삭제됐고 사모펀드와 헤지펀드에 투자하지 못하도록 규제한 조항은 Tier1 자본의 3% 이내로 완화됐고 장외파생상품 취급을 금지하도록 한 조항도 완화됐다. 이런 미국의 상황은 G20의 논의에도 그대로 반영될 것으로 보인다. 간접적으로 규모의 제한을 꾀하는 은행세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서울 G20에서 한국이 금융활동세를 제안할 것인지가 관심일 정도이다. 만일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은행세 논의에 불을 붙인다면 그건 평가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막상 국내에서 기재부는 자본시장통합법을 통과시켜 금융기관 몸집불리기에 일로매진하고 있다. 한국 기재부는 금융위기 이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박병원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금융위기가 터진 후에도 “물에 들어가야 수영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호언했을까?

서울 G20의 최대 쟁점은 환율문제이다.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답만 말한다면 고정환율제든, 변동환율제든, 아니면 관리환율제든, 소프트 달러페그든 환율제도는 각국이 택할 일이다. 자본이동과 변동환율제가 시장근본주의자들의 처방이지만 이 둘을 택한다고 해서 ‘트릴레마의 공식’처럼 국내 금융정책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중국이 변동환율제를 택해서 어느 순간 버블이 붕괴하고 급격한 경기위축을 겪는다고 상상해 보라. 그것은 더 끔찍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보고서는 환율이 아니라 최근 악화된 글로벌 불균형의 본질을 찌른다. 97-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IMF의 조건(conditionality)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은 바 있는 동아시아 국가들은 외환보유고를 가능한 늘리려고 한다. 자국 통화가 국제통화가 아닌 나라에서 외환보유고는 곧 위기에 대한 “자가보험”(owned insurance)인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 나라의 국내 수요를 위축시킬 뿐 아니라 글로벌 총수요를 감소시키는 결과를 낳아서 모두에게 나쁜 상황을 불러온다. 한편 미국의 처지에서도 달러 기축통화를 유지하는 비용이 점점 늘어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물론 국내의 침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미국이 다른 나라의 통화를 동시에 절상시키기 위해서 대규모 양적 완화(quantitive easing)를 하는 것은 스티글리츠가 보기에 상황을 악화시키는 악수일 뿐이다. 미국은 유동성 함정에 빠져 있으므로 경기는 살아나지 않고 자산버블만 불러 일으킬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 고안에 착수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사명”이다. 현재의 미국처럼 기축통화를 가진 나라가 글로벌 총수요와 유동성 수요를 감안하지 않고 자국 경제를 위한 금융정책을 사용하면 세계 금융시스템은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다. 어느 한 나라의 통화가 아닌 글로벌 기축 통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국제통화증서”(ICC, Internation Currency Certificates)를 새로 만들든 아니면 기존의 SDR을 대폭 확대하고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든 케인스가 제안했던 국제청산동맹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구상이다. 이것이 총수요를 유지하거나 늘리면서 불안정성을 제거하는 근본적인 방향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국이 달러의 특권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에 이 구상이 실현되려면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것이다. 보고서는 지역통화시스템의 확대를 또 하나의 가능한 경로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치앙마이협정을 확대해서 새로운 준비금제도를 만든다면 아시아에 새로운 통화체제가 생기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지역통화체제가 다시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으로 모이는 ‘진화적 경로’를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G20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아직 없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등이 달러를 대체하는 새로운 통화체제를 주장하고 있으니 내년 파리 G20에서는 이같은 방향의 구상이 제시될 것이다. 다만 한국이 이번에 새로 내놓은 ‘금융안전망’ 의제가 치앙마이협정의 확대개편 쪽이라면 파리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모든 주제에 관해서 개발도상국과 최빈국에 대한 고려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다. 예컨대 보호무역주의에 관한 논의도 선진국의 보조금을 문제삼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위기 시의 각종 보조금, 예컨대 미국 경기자극패키지에 들어 있는 “바이 아메리카”는 명백한 보조금이며 덤핑판정이나 상계관세야말로 문제가 심각한 보호무역조치라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환경문제 대한 관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티글리츠 보고서는 글로벌 생태 케인스주의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 G20이 새로운 의제로 채택한 “개발”이 이런 방향의 해결방안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진전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3 2010년 서울 어느 호텔, 그리고 한미 FTA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30일 베트남 하노이 국립컨벤션센터에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을 만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용이 거의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제시한 의제는 대체로 올바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스티글리츠 보고서가 질타하고 있는 시장근본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국내 정책(예컨대 자본시장통합법이나 금융서비스 완전 개방, 의료민영화등)과는 다행히도 상당한 거리를 보이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금년 초에 선물환규제를 도입한 신현송 국제경제보좌관의 영향력 때문이 아닐까, 짐작할 뿐이다.

그러나 “역시 이명박”이라고 할만한 사건은 서울 G20에서도 벌어질 예정이다. 이 기간동안 발표할 한미 FTA 재협상 결과가 그것이다. 한미 FTA야말로 스티글리츠 리포트가 질타하는 시장근본주의, 금융서비스시장 개방의 독소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번 위기를 통해 얻은 교훈에 비춰보면, 국가의 권한을 제한하는 (한미FTA와 같은, 인용자)협정들은 반드시 바뀌어야 한다... 특히 WTO의 금융서비스협정 아래서 가능한 합의들이 강제된다면 각 국가들이 성장.공평성, 안정화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규제체계를 개선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무역협정들을 재검토해야 한다.”

잘 아다시피 한미 FTA는 WTO의 각종 국제협정을 능가하는 나프타플러스 협정, 또는 골든 FTA이다. 우리가 금융안정성을 위해 확보해야 할 정책공간을 완전히 봉쇄하려는 것이다. 이미 발효된 협정이라도 재검토해야 할 그런 시점에 우리는 쇠고기와 자동차를 더 넘겨주면서까지 미국의 금융위기를 이 땅에서 재현하려고 국가의 온 힘을 경주하고 있다. G20에서 아무리 빛나는 제안을 한들 무슨 소용일 것인가?

현실의 G20은 미국 중심의 거대 금융자본, 그리고 강대국의 이익이 관철되는 장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스티글리츠 보고서의 개혁은 비현실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누가 뭐라 해도 확실한 것은 이런 방향의 개혁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이뤄지지 않는 한 현재의 위기가 계속되거나 조만간 또 다른 위기를 맞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 역자와 출판사에

앞서도 말했듯 이 책은 혼돈의 시대에 우리 국민 모두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 특히 미래를 꾀하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앞으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 책은 빛을 발할 것이다. 해서 하는 말인데 지금이라도 교열과 교정에 시간을 들이고 간간히 보이는 오역을 바로 잡기 바란다.

거시경제가 모조리 “겨시경제”로 되어 있어 볼 때마다 짜증을 자아낸다. 수많은 주제를 다루느라 논증이나 실명논쟁을 생략된 책이기 때문에 의역하지 않으면 굉장히 어렵게 느껴지거나 또는 좋은 말만 나열한 책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정도라면 원문에 가깝게 문장을 손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때론 용어 자체를 잘못 번역한 것도 있고(예컨대 national treatment는 “내국민대우”라는 통상용어이다) 심지어 오역을 넘어 반역을 한 곳도 있다. 예컨대 “이러한 준비통화는 대부분 경화로 유지되기 때문에, 곧 미국이나 여타 선진국들의 재원이 이들 국가로 이전되는 것을 의미한다”(p278)가 그렇다. 미국으로 재원이 이전된다는 게 올바른 번역이다. 또 p281의 “그런 기대는 충족되지 않았다. 그저 각국은 거시경제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율성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도 반역에 속한다. 실제 내용은 자율성을 갖게 되리란 기대도 충족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른바 트릴레마를 염두에 두고 의역을 하다 보니 생긴 실수이다. 이 책은 그런 이론적 명제들을 넘어선 복잡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일일이 영문을 대조하면 훨씬 더 많은 문제가 나타날지 모른다. 신속한 번역에 또 한번 감사들 드리지만 한번 더 땀을 흘려 주는 수고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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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의 한마디로 SSM 규제법 처리가 미뤄졌단다.

그렇다면 김종훈은 한국의 입법부, 행정부, 그리고 사법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의 위에 있다.

북미 FTA를 캐나다의 정치학자는 "초헌법"이라고 불렀다. 그게 발효되면 기존의 헌법 마저 간단히 무시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투자자 국가제소권은 미국 연방법원 판사들마저 사회권, 평등권 위반이라고 한탄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헤르만 판 롬푸이 유럽연합(EU) 정상회의 상임의장, 주제 마누엘 바로수 EU 집행위원장(뒷줄 왼쪽부터)이 지켜보는 가운데 6일 오전(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EU 이사회 본부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스티븐 바나케르 EU 의장국 외교장관, 드 휴흐트 EU 집행위원회 통상담당 집행위원(앞줄 왼쪽부터)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에 공식 서명하고 있다. /경향신문 박민규 기자



김종훈은 이를 한껏 이용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했다.

1) 국내에서 SSM 규제 논의가 되는 걸 알면서도 EU와의 협상에서 소매서비스에 대한 제한(유보)을 하지 않았다. 산자부(지금 이름이...애구)나 기재부 등과 합의했다면 공모요, 아니면 대통령까지 기망한 것이다.

2) 물론 입법부는 완전히 무시했다.  FTA는 국제협정이니 촌스러운 국회의원들은 나를 따르라는 것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발효되지 않았으니 먼저 입법하면 그만이고 그 이후에 처리할 수도 있다.

만일 한 EU FTA가 발효되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문제가 될테지만 미래에 있을 어떤 법 때문에 지금 당장 필요하고 국민이 동의하는 법을 뒤로 미룬다는 게 말이 되는가? 고쳐야 한다면 아직 입법이 되지 않은 한 EU FTA를 고쳐야 한다.

3) 한 EU FTA 상 유럽 7개국에 대해서는 소매서비스 상의 유보를 허용했다. 한국의 유통업이 이들 나라에 진출하려면 이른바 "경제적 필요 검증"을 하도록 한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통상본부장이다. 만일 장기적으로 우리 경제를 위하는 갸륵한 생각이었다면(사실 이 분은 경제도 모르고 통상도 모른다. 2006년 당시 가트도, 나프타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그 생각은 유럽 7개국에 대해서도 관철시켜야 했다.

사실 이 문제에 관해서 한국 재계는 "경제적 필요 검증"을 끔찍이도 반대했다. 당장 지방에 SSM을 설립하는 데 방해가 됐기 때문이다. 김현종에 이어 김종훈도 삼성에 갈 모양이다.

4) 한미 FTA에서 이미 소매서비스를 개방했으니 "이왕 버린 몸"이라고, 소매서비스 개방을 무기로 삼았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5) 사법부도 걱정된다. 제대로 공부는 하지 않고 국제협정이라면 그저 껍벅 죽으니... 친환경 급식이 WTO 위반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사법부가 앞으로 한미 FTA, 한 EU FTA 앞에서 얼마나 우리 국민을 위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김종훈은 전 세계 모든 자본가의 이익을 충실히 반영하면서 이제 동아시아의 한 국가 쯤은 우습게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 무소불위다. 이명박 대통령이 화날만 한데... 이 분 역시 자본가를 위한 거라면 그냥 참는 분일테니.. 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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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욕 하다 보니 G20 재무부 장관회의 결과를 자화자찬하는 한심한 공무원들도 떠오른다... 아... 이건 나중에...

(결론만 쓴다면) 아무 합의도 이루지 못했으면서 통화전쟁을 휴전시켰다고? 뭐.. 합의야 불가능한 거였지만 그걸... 이리... 그거 잘 한 일로 알고 마구 떠들 대통령이 불쌍하다.

중국이 정말 시장에서 환율을 결정하면,이게 뭔 말인지 알 수 없지만(펀더멘탈을 반영한다는 말은 1944년부터 지금까지 정의된 바가 없다) 정말 난리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앞으로 인민폐(위앤화)가 절상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모두 달러를 내다 판다. 오버슈팅까지 되어 미국 소원대로 위앤화 절상이 중국 경제를 급격하게 위축시키면? 하하하 이건 미국도 바라는 상황일 수 없다.  물론 한국은 끝이다.

이 문제는 밑의 글에도 썼지만 기축통화 문제, 적어도 준비금 제도의 문제로 풀어야 한다. 대안으로 치앙마이 협정의 국제적 확대 등 새로운 준비금 제도를 제시했어야 한다.

그리고 흑자국, 적자국의 내부 경제정책 기조의 문제이다. 확실한 것은 어느 쪽이나 자산/소득 재분배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라는 사실이다.

이 얘긴 이론이 필요하기 때문에 조금 정리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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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딸기 2010.10.27 15:4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교수님 넘 잘읽었습니다.

  2. wk 2011.04.29 10:3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종훈은 삼성에 안 갈 것 같습니다. 늙은 퇴물이니까 삼성이 안 뽑을 것입니다. 대신 선물 많이 주겠죠.


정태인(경제 평론가)


민족경제론의 확장(2) 국내 소비와 공공성의 연관(민중의 생활 상의 요구의 확장)

 

1990년대 중반 이래 국내 소비 증가율은 답보상태이다. 시장만능의 정책이 서민들의 삶을 규정하는 의교주(醫敎住) 비용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의료민영화, 교육시장화, 공급 위주의 주택 정책이 이런 경향을 극단으로 밀고나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5분위 소득통계에서 하위 1,2,3분위(즉 서민)의 소비가 줄어들거나 아주 미약하게 증가하는 이유는 애초에 가처분소득 증가가 거북이 걸음이기도 했지만 그 소득도 마음대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집값이 치솟는 상황에서 어렵게 모은 돈에 은행 대출을 보태서 집을 구입한 사람이라면 대출이자 갚는 데 허덕일 것이고 전세로 사는 사람은 전세값 인상에 전전긍긍해야 한다. 

교육물가는 일반 물가의 두세 배 올랐고 사교육비는 연 30조원을 넘나든다. 이 둘만으로도 소비의 증가는커녕 갓난애를 가진 주부들도 파트타임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아직 건강보험은 건재하지만 곧 민영보험이 확대되고, 영리법인화에 이어 병원당연지정제가 폐지되거나 완화되면 의료비는 가계 파산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점점 더 서민들의 소비는 축소된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집값이 지속적으로 하락할 것이라고 믿을 수만 있다면 지금 집을 파는 것이 유리하다. 당장 대출을 다 갚고 열심히 일만 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집을 살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래야 소비도 증가할 수 있다. 공급이 아무리 증가해도 한가구가 서너채, 심지어 수십, 수백채를 소유한다면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투기적 수요를 억제하기 위한 보유세(이명박 정부가 사망선고를 내린 종부세)를 대폭강화해야 한다. 1가구 1주택 원칙을 법제화하고 영구 채권으로 과다 보유분 택지를 사들인다면 훨씬 더 빨리 부동산 가격은 안정될 것이다. 보유세 수입으로 공공주택을 늘려야 한다. 

이런 원칙 하에서 비로소 계층별 세부정책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극심한 학력사회에서, 더구나 1-2점으로 당락을 가르는 입시제도로는 사교육이 아이들의 미래를 결정하게 된다. 학부모들은 자신들 능력 이상으로 사교육에 투자를 한다. 
이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의 성격을 가졌는데 결국 돈 많은 사람이 무조건 이기게 된다. 진보의 대안은 국공립대학 통폐합부터 시작하는 사실상 대학입시철폐(자격고사)이며, 대학에서 아이들이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 수많은 과목과 전문적인 수준을 사교육이 대신할 수는 없다. 

거의 100% 공교육을 하면서 학생들의 학력이 세계수준인 핀란드나 노르웨이가 우리의 모델이다. 적어도 경제 위기 동안 사교육을 중지해야 하고 대학의 등록금을 법인세 증세로 충당해야 한다. 
여기서 절약되는 40여조원(사교육비 + 등록금) 중 30조원은 교사의 확충과 재교육 등에 쓰고 나머지는 소비를 증가시키는 데 쓰이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공교육 강화를 넘어서 핀란드식 완전한 평준화를 이뤄내야 한다. 교육에 관한 한 적어도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한다.

의료비 문제는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확대해야 해결된다. 아이들의 진료, 암 등 가계의 파산을 불러오는 중병부터 보장성을 확대해서 전체적으로 90% 수준까지 끌어올려야 한다. 적어도 위기 동안은 세금으로 이를 충당해야 한다. 
의료기관의 영리법인화가 아니라 공공 의료시설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예컨대 맹장수술을 할 수 있는 지역거점병원을 군단위마다 만들어야 한다. 공공의료의 효율성은 이미 증명돼 있다. 오바마가 건강보험을 도입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것이 그 증거이다. 
민간보험과 영리병원이 확대되면 그만큼 의료공공성의 확립은 어렵다.

우리 삶의 필수재의 공공성을 강화할 때 비로소 서민들은 일반 재화를 소비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에 대한 효율적 투자가 사회의 생산성을 가장 확실하게 높이는 수단이라는 것은 이미 국제적으로 증명됐다. 
그런 의미에서 의교주(醫敎住)의 공공성 강화는 사람에 대한 가장 중요한 투자이기도 하다. 바로 현재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이다.

특히 1,2분위의 서민에게는 공공요금도 큰 부담이다. 이명박 정부는 철도, 전기, 개스, 수도, 우편등 네트워크산업의 민영화로 문제를 해결한다고 나섰지만 이 역시 대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정책일 뿐이다. 
특히 대기업과 부자들에 대한 감세로 인해 재정적자가 심각해지면 일거에 문제를 해결할 요량으로 엄청난 자산을 가진 공기업의 민영화를 들고 나올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네트워크 산업 민영화는 독점으로 인한 전반적인 가격 상승, 교차보조금 폐지에 의한 지역 서비스의 중단 등 부작용을 낳는다. 이 점은 이미 선진국에서도 반복적으로 증명됐다. 공기업의 서비스를 향상시키기 위해 공기업 지배구조에 노동자와 소비자가 참여하고 사회공공회계를 도입하는 것이 진보의 대안이다.

요컨대 대기업과 부자들의 손에 쌓인채 경제의 거품을 늘리는 쪽으로만 사용되는 돈을 공교육, 공공의료, 공공주거, 공공서비스로 돌릴 때 비로소 투자와 소비, 그리고 장기 생산성 향상의 기틀이 마련되는 것이다.

한미 FTA는 이런 전략에도 넘을 수 없는 걸림돌이 될 것이다. 

한미 FTA는 한번 민영화되거나 규제가 완화된 분야에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라도 되돌아갈 길을 끊어 버린다. 서비스 분야 현재 유보에 적용되는 래칫 조항(역진불가능 조항)이나 투자자국가제소권은 재국유화라든가 공적 규제의 강화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전국농민대회에 참가한 농민들이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향신문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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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 평론가)



민족경제론의 확장(1) 국내 산업연관과 중소기업론(자립적 재생산 구조)의 재해석

신자유주의의 종주국 영국의 고든 총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시장만능의 정책기조는 이미 파산했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위기를 빌미로 바로 그 난파선에 올라타려 온갖 수를 다 쓰고 있다.

이명박 정부는 6-70년대의 박정희식 성장전략인 수출지상주의와 건설붐을 경기대책으로, 그리고 전형적 신자유주의 정책인 감세, 규제완화, 공기업 민영화를 구조적 대책으로 결합한다. 

이것은 최악의 조합이다.

이명박정부의 이런 구조 정책은 2000년대 8년간 부시정부의 정책과 정확히 일치하며 동시에 신자유주의의 금과옥조, 워싱턴 컨센서스이기도 하다. 과연 이런 정책기조가 경제적 성공을 가져올 것인가. 
지금 진행 중인 금융위기가 바로 그 답이다.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이름 붙인 대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아닌 "서브 프라임 체제의 위기"(subpirme system crisis)로 불려 마땅한 현재의 금융위기는 80년대 이래 금융자유화를 축으로 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근본적 위기이다. 즉 그것은 세계정부에 준하는 국제적 규제를 만들지 않고서는 쉽사리 해소되지 않고 더 큰 규모로 재현될 것이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국내 정책은 도대체 뭐가 있을까?

투자를 늘리는 방법 - 중소기업론의 중요성

정부는 기업들의 투자를 늘리기 위해서 법인세 등을 낮추고 ‘비지니스 프렌들리’ 환경을 만들어야 하며, 그래야 서민경제도 좋아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물이 넘쳐야 아래쪽도 적신다는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요, 강물이 불어나면 모든 배가 솟아오른다는 박정희시대의 믿음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2006년 기준 1000대기업의 사내유보가 364조원이다. 법인세를 5%포인트 인하해서 8조원 가량 보태주면 투자가 획기적으로 늘어날까?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까지 고려해 보면, 특히 대기업들의 투자는 여전한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작년 국내기업들의 해외 직접투자가 267억 달러(신고기준)를 넘어섰으니 총고정자본형성의 10% 정도는 해외로 빠져 나간 셈이다. 
이 수치를 줄이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국내의 제조업 수익성을 높이는 환경을 만들지 않는 한 이 수치를 어떻게 하는 건 불가능하기도 하다. 문제는 사내유보이다. 

금융화의 환경에서 이 돈은 주식투자나 부동산투자, 즉 고용을 늘리는 제조업보다 훨씬 단기 수익성이 높은 자산에 ‘투자’된다. 수도권 규제완화, 수도권 광역 클러스터 육성, 금산분리 완화, 한반도 대운하는 어마어마한 현금이 곧 부동산과 건설에 투입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부자들의 수입증가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 

2006년 개인의 대외거래수지 적자규모가 180억 달러이다. 즉 GDP의 2%에 가까운 돈이 해외 여행경비, 유행연수비, 조기유학 등을 위한 증여성 송금, 해외이주비로 쓰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 외국에서 수입한 사치재를 포함하면 이 수치는 훨씬 더 불어날 것이다.

요컨대 대기업과 부자의 부를 늘리는 감세 및 규제완화정책은 국내의 일자리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많은 부분이 해외로 빠져 나가기 때문이다. 
물이 넘쳐도 외부로 빠져 나가버리고 강물이 불었는데 오히려 수많은 배들이 침몰하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답은 확실하다. 투자와 소비를 늘리고 위해선 중소기업의 수익과 서민들의 소비를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중소기업의 투자와 영세자영업을 살리는 방법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세우고 기업들에게 ‘핫라인’을 개설한 이명박 정부가 시작되자 마자 중소기업인들이 데모를 하고 나섰다. 중소기업은 우리나라 일자리의 90%를 담당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투자가 늘어나야 일자리도 증가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소기업을 방문, 구내 식당에서 직접 배식을 받고 있다. (경향신문 보도자료)

 

원청업체인 대기업이 국제적 원자재 가격의 상승을 납품 단가에 반영해 주기는 커녕, 해외공장이전 위협 등을 무기로 납품 단가를 후려치는 마당에 신규투자는 언감생심이다. 

불공정거래를 단속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노동자의 생산성이 향상되지 않는 한 중소기업의 상황은 기껏 현상유지에 머무를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연대전략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관건이다. 저소득층 국민연금 보험료 지원(복지소득연대), 고용보험기금 지원에 의한 최저임금 인상(임금소득연대), 연 2000시간 노동시간 상한제와 일자리 나누기(노동시간-일자리연대)는 중소기업 노동자의 생활안정과 생산성 향상에 획기적인 출발점이 될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재교육이 중소기업이 살아날 길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98%에 이르는 50인 이하 기업은 사회연대전략의 도움을 받아 노동자들의 삶을 안정시키더라도 재교육 등 훈련 프로그램을 시행하기 어렵다. 
지역별, 산업별 재교육 프로그램에 지역대학이 참여하고 지역공동체가 나서야 한다. 또한 지역재투자법과 마이크로크레딧에 의해 형성된 지역의 서민금융이 자금 지원과 컨설팅의 핵심적인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중소기업의 클러스터화와 재교육에 의해서 네트워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것이야말로 산업공동화 문제와 일자리 문제, 거시 투자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다.

매년 50만개가 창업하고 40만개가 폐업하는 분야, 26.5%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2003년부터는 임금노동자보다 실질소득이 낮아진 분야가 자영업이다. 중소기업과 마찬가지로 자영업의 활로 역시 규제로부터 찾아야 한다. 
유럽이나 일본은 물론 월스트리트에서도 월마트를 규제한다. 월스트리트-월마트형 자본주의는 소비자혜택을 늘린다고 하지만 중소업체에 대한 단가 후려치기, 임시 비정규직 노동을 통해 거시적으로는 일자리와 소비를 축소시켜서 결국 과소소비-과소투자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다. 

자영업은 지역경제와 지역운동의 핵심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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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 평론가)


1) 아래로, 또 아래로 - 자산재분배와 풀뿌리 공동체

 

투기를 불러 일으킨 15년 전의 공무원들이 장차관을 하고, 또 금융기관에 포진해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제 또 다시 이 위기를 수습한다며 세금을 주무를 것이다. 금융기관의 경영진은 예외없이 갈아야 하고, 책임있는 국장급 이상 공무원은 퇴출해야 한다. 건설 자본은 이 참에 세계의 평균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국민의 돈이 들어간 금융기관은 자금중개와 안정된 금융시스템의 유지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국민이 통제해야 한다. 국제적 투자은행이라는 헛된 꿈을 지닌 경영자와 공무원은 모두 쫓아내야 한다.

 

부자들 감세를 철회하고 그 돈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 도로에 투자할 돈이라면 군단위에 병원을 만들어야 한다. 사교육을 폐지하고 등록금을 줄여서 30-40조원의 돈이 소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건강보험의 보장율을 80%까지 높여서 민간보험에 들어간 돈이 풀려나야 한다(약 5조원). 소규모 1가구 1주택의 가계 파산자의 집은 정부가 원가로 사들여야 한다. 한반도 대운하에 들어갈 돈을 전혀 쓰지 않고도 전국의 아름다운 숲과 오솔길을 늘리고 이을 수 있다. 고통을 분담한다며 공기업의 노동자 10%를 해고하는 이 정부의 아둔함을 노동조합이 따라 해서는 안된다. 노동시간을 줄여서 일자리를 나누고 비정규직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민단체 회원들이 부자감세 철회와 실업대책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경향신문 보도사진)


 

정부의 투기정책(수도권 규제완화, 종합부동산세 폐지, 재건축 규제완화 등)은 철회되어야 하고 반대로 자산가격을 하향 안정화시키고 공동체의 자산소유를 늘려야 한다. 네트워크산업(전기,수도,개스,철도,우편등)과 가치재산업(의료,교육,주거)의 민영화, 시장화를 중지하고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이 모두를 풀뿌리 공동체 차원에서 실천하는 것이 30년짜리 위기에 대한 대응의 올바른 방향이다. 이러한 정책을 체계화한다면 어느덧 케인즈의 소득재분배를 넘는 새로운 자산재분배의 경제학이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케인즈로 되돌아가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오로지 아래로, 또 아래로 돈이 흐르게 만들어야 한다. 부자들이 이길 수 밖에 없는 게임에 스스로 뛰어 들면서(사교육, 부동산, 민간보험) 내 가족만은 살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을 버려야 한다. 우리 모두 살 길만 있지 나만 살 길은 없다.

 

2) 쓰나미를 막을 방파제 - 통화금융체제의 개혁과 아시아 금융협력

 

대외적으로는 금년에 또 닥칠 가능성이 높은 외국발 금융위기의 해일을 막을 방파제부터 쌓아야 한다. 외환보유고, 단기외채, 경상수지, 만기불일치의 대용변수 등으로 구성된 ‘인계철선’(위기를 감지할 수 있는 신호)을 설치하고 외환시장 및 자본시장의 패닉을 진정시킬 수 있는 ‘과속방지턱’(상황에 따라 자본유출입을 조절하는 장치)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통화불일치의 정도에 따라 환율의 변동을 제한하고 포트폴리오의 유출입도 규제해야 한다. 또한 증권거래세인 케인즈세와 외환거래세인 토빈세를 결합한 이중가변토빈세(자본유출입 및 경기상황에 따라 세율 조정)를 도입하고 유입자본의 일정 비율을 한국은행에 1년 단위로 예치하는 외환가변유치제도도 상황에 따라 발동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650억 달러의 외환보유고로도 환율의 안정성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아이켄그린이 말하는 ‘원죄’(original sin, 자국 통화, 예컨대 원화로 해외에서 기채를 할 수 없는 것) 때문이므로 우선 한중일 세 나라의 이해가 일치하는 아시아 채권시장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 통화스와프의 규모를 늘리고 발동의 요건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등 아시아통화안정체제의 제도화도 더 빨리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우리의 외환보유고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현재 64% 정도)을 점진적으로 줄여서 달러 패권의 약화라는 100년짜리 경향에 발맞춰 나가야 한다. 버냉키 등 주류경제학의 주장인, 변동환율제와 통화안정정책의 결합은 한국과 같이 달러에 강하게 연동되어 있는 나라에서는 금융마비를 가져 올 뿐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요컨대 달러와의 연계를 줄이고 아시아 통화와 결합하는 것, 환율변동의 폭을 줄이고 금융시스템 전체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 통화금융체제 개혁의 방향이다.

 

한국의 기재부(구 재경부)는 지난 10여년간 오로지 자본시장의 완전 자유화와 투자은행 설립을 목표로 움직였다. 바로 그 모델인 미국의 금융시스템이 현재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것이 증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배우려면 물에 들어가야 한다”(박병원 경제수석)는 해괴한 논리로 오히려 박차를 가하고 있다. 자본시장 통합법, 재벌의 은행 소유를 노리는 금융지주회사법, 은행법 개정 등은 모두 중지해야 한다. 그 알량한 수영을 배우기 위해 모든 국민이 난파선을 탈 수는 없지 않은가. 거꾸로 투기를 불러 일으키는 잘못된 유인구조와 부실한 규제를 한꺼번에 손봐야 국내발 금융위기를 막을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는 통화가치 안정이라는 한국은행의 협소한 목표를 금융시스템의 안정으로 확대하여 훨씬 많은 힘을 주어야 한다.

 

모든 문제가 참여정부의 탓이고 또한 외부에서 발생한 금융위기 때문이라는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강변도 금년을 거치면서 완전히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중도와 실용을 외치다가 슬그머니 진보의 껍데기를 뒤집어 쓰려는 민주당의 무능은 더욱 두드러질 것이다. 절망에 빠져 메시아를 갈구하는 대중은 자칫 잘못하면 파시즘을 선택할 수도 있다. 꽃이 피면 반드시 같이 피어날 촛불과 함께 좀 더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진보가 그 희망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역사적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생명이 달려 있기에 더욱 절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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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인(경제 평론가)



2) 이명박식 성장주의의의 귀결 - 공공성의 파괴와 생명의 위협


수도권 규제완화, 재건축 규제완화, 부실 건설사들에 대한 9조원 이상의 지원, 5+2 정책(광역 클러스터 정책), SOC 건설, '4대강 정비사업'은 모두 ‘전국의 삽질’ 정책이다. 이는 정확히 일본의 '잃어버린 10년' 정책을 답습하는 것이다.



이러한 투기 정책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요는 이미 가계부채에 시달리는 중산층이 이런 투기수요 유발 정책에 넘어가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성공하는 경우 우리는 미증유의 거품폭발을 거쳐 2010~11년경 -5% 이하의 성장이라는 대위기를 맞을 수 있고, 다행히 중산층이 말려 들어가지 않는 경우 약간의 거품을 거친 후 3년 이상 지속되는 0~-2%의 장기침체를 맞을 것이다. (이미 그 조짐은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말 현재 금융권의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모두 332조 8000억원. 올들어서만 19조 4000억원이 늘었다. 이 정도라면 우리 국민들의 낙천성도 놀랄만 하다.) 더 큰 거품으로 거품을 덮는다는 이명박 정부의 발상은 결국 그 폭발과 더불어 한국발 금융위기, 나아가 외환위기를 촉발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폭탄을 끌어안고 있다. 바다를 건너 튄 불똥은 한국 안의 폭탄에 옮겨 붙었다. 부동산과 자장면이 똑같다면서 분양원가 공개를 거부한 노무현 정권이 불러온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의 부실은 100조원이 넘을 것으로 짐작된다. 짓기만 하면 돈벼락을 맞는다던 주상복합 건설 사업에 저축은행(12조 2천억원), 은행(47조 9천억원+매입약정 10조원), 그리고 제2금융권이 파악도 되지 않는 돈을 쏟아 부었다. 도처에 널린 황량한 겨울 공사장은 아무 상관도 없는 국민에게 곧 천문학적 공적 자금을 내라고 강요할 것이다. 아주 낙관적으로 20%만 망한다 해도 무려 20조원이 넘는다.

 

헛된 욕망은 일반 국민도 예외가 아니다. 지금 빚을 내서라도 집을 못사면 평생 이사만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리라는 초조함에 서민들까지 열심히 은행을 찾았고 위험한 기업대출보다는 안전한 고리대를 챙기자는 금융기관들은 그 욕망을 부추겼다. 한국은행의 2008년 9월 발표로도 가계 빚이 660조 3000여억원이고 이 중 부동산 대출을 약 30%로 치면 200조원 가량 될 것이다. 더구나 은행은 넘쳐나는 유동성을 부동산 담보 대출로만 풀고 있다. 만일 현재의 투기정책이 실물경기의 침체와 맞물려 결국 부동산 값의 폭락을 가져 온다면 곧 대규모 실업과 임금삭감이 닥칠텐데 제대로 원리금 상환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출과 부동산으로 불만 지피면 규제완화와 민영화가 자동적으로 우리 경제를 선진화할 것이라는 주문 역시 이미 실천되고 있다. 특히 공기업 민영화는 이명박 정부의 구미에 딱 맞는 정책이다. 첫째 국민들은 공기업에 대한 불만이 많다. 우리의 공공서비스가 국제 수준과 비교할 때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에 관한 객관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공기업은 비효율적이며 ‘철밥통’이라는 예단은 누구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과거 20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그랬듯 '개혁'의 이름으로 공공성 파괴가 자행되는 것이다. 둘째, 공기업 민영화는 단숨에 엄청난 수입을 보장한다. 철도나 우체국과 같은 네트워크 산업의 자산은 천문학적이다. 경기를 살리겠다고 약속한 임기 내 70조원 규모의 소득세 인하, 법인세 인하 등 감세정책과 최근 편성한 대규모 건설투자가 초래할 엄청난 규모의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셋째, 이런 어마어마한 기업을 인수할 능력은 재벌만 가지고 있다. 민족주의적 감정에 호소하면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 부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일일이 폐해를 거론할 것도 없이 이러한 민영화/규제완화는 현재 제공되는 최소한의 필수적 공공서비스도 무너뜨릴 것이다. 예컨대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건강보험(정보의 비대칭성), 교육(외부성이나 평등 지향) 등 가치재 산업을 민영화하면 고급 서비스 시장이 발전하는 대신 공교육이나 공공의료에 투입되는 자원과 인력이 줄어들어 사실상 공공성이 무너지게 된다. 일반 국민은 그 동안 누리던 공공서비스 마저 잃게 되는 것이다.

 

전기, 철도, 개스, 수도, 우편 등 네트워크 산업의 경우에는 자연독점과 교차보조의 필요성 때문에 공기업이 담당해 왔다. 이런 산업을 민영화하면 일반적으로 공공요금이 상승하는 가운데, 특히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 공급되는 서비스 가격은 급등하거나 서비스 자체가 끊어질 수 밖에 없다. 어떠한 민간기업도 교차보조금을 주면서까지 이런 서비스를 유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촛불의 기세에 눌려 건강보험 민영화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지만, 보험업법을 개정해서 민간의보를 확대하고 병원의 영리법인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이는 병원당연지정제의 폐지로 이어져 곧 건강보험을 붕괴시킬 것이다. 공정택씨가 서울 교육감에 당선되자 마자 일사천리로 국제중학교를 세우는 것은 공교육 붕괴의 신호탄이다.

 

더구나 이제 비준만 남겨 놓은 한미 FTA는 한번 민영화되거나 규제가 완화된 분야에서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라도 되돌아갈 길을 끊어 버린다. 서비스 분야 현재 유보에 적용되는 래칫 조항(역진불가능 조항)이나 투자자국가제소권(ISD)은 재국유화라든가 공적 규제의 강화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든다.

 

특히 건강과 생명이라는 생활 상의 원초적 요구는 신자유주의의 통상원리와 정면으로 맞부딪힌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 환경과 건강 정책은 사전예방의 원칙을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문제는 이 원칙이 미국 고유의 통상 논리에 의해서 원천적으로 부정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쇠고기 수입의 예를 들자면 미국은 한국이 30개월 이상의 쇠고기 수입을 금지하려면 그 과학적 증거를 내 놓으라고 요구했다.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주장은 '필요불가결 증명'(necessity test=미국 통상의 원리)의 응용이다. 즉 30개월을 기준으로 수입규제를 하려면 그 규제가 필요불가결함을 먼저 과학적으로 증명하라는 것이다. 사후예방의 원칙에 대비해서 '사전증명의 원칙'이라고 부를 만하다. 쉽게 말해서 사전예방의 원칙이란 아직 확증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나 자연에 치명적일 위험이 존재한다면 우선 규제를 해야 한다는 것인 반면, 사전증명의 원칙은 그 위험을 먼저 '과학적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상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것이다. 즉 생명을 우선할 것인가, 아니면 기업 이윤을 먼저 보호할 것인가의 대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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