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인(경제 평론가) 

이 글은 2009년 4월 일본 세카이지에 실린 “3중의 위기와 이명박정부의 실정”과 또 하나의 원고(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과 민족경제론)를 합치고 대폭 수정, 보완한 것이다. 특히 2장 이명박 정부의 정책 부분은 최근의 통계를 이용해서 거의 다시 썼다. 그러나 새로 한 일이란 주로 시제를 바꾸는 것이었으며 실제의 내용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 글이 워낙 장기에 걸친, 또 앞으로도 지속될 대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3중의 위기


 
“현재의 위기는 약 10년마다 오는 산업순환 상의 위기에, 시장만능론이라는 30년짜리 지배 이데올로기의 위기, 그리고 100년에 한번쯤 오는 패권국가의 위기가 겹쳐진 것이다”(정태인, 경향신문, 12월 3일자, 경제칼럼) 말하자면 ‘3중의 위기’인 셈인데 1929년 즈음의 대공황기가 이에 해당하는 유일한 역사적 사건이었을 만큼(물론 패권국가 위기의 위치에서 상당한 차이가 나지만) 우리는 지금 좀처럼 체험하기 힘든 역사의 고비에 서 있다.


밑의 그림에서 보듯이 우리는 1945년 이후 대체로 10년마다 찾아오는 6번째 산업순환상의 위기를 맞고 있다. 금융스캔들만 봐도 80년대 말에 터진 블랙먼데이와 S&L사건, 90년대말의 LTCM사태, 2001년의 엔론사태가 있었고 이런 문제들이 그 때 그 때 미봉되다가 급기야 수습 불능의 시스템 위기로 발전한 것이 이번의 위기이다.



 


60-70년 주기의 콘드라티에프 파동으로 본다면 45년부터 70년경까지의 호황(A국면)에 이어 그 이후 전개된 하강(B국면)의 마지막 단계에 우리는 서 있다. A국면은 주지하다시피 포드주의, 복지국가, 케인즈주의가 일궈낸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 오랜 호황과 재정확대정책이 불러온 인플레이션, 달러본위제에 따른 미국의 경상수지 악화는 결국 71년 닉슨의 금태환 정지 선언, 그리고 73년의 오일쇼크로 이어져 ‘영광의 30년’은 끝을 맺었다. 공화당 후보 닉슨이 “우리는 모두 케인지언”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때 케인즈주의는 이미 막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레이건과 대처가 등장하면서 금융자본 우위의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이 흐름은 라틴 아메리카 외채위기를 겪으면서 90년대 초에 감세와 민영화, 그리고 규제완화라는, IMF-미재무성-월스트리트 3각동맹의 ‘워싱턴 컨센서스’로 정식화되었다. 80년대부터 2007년까지 미국은 평균 2.9%의 경제성장을 거뒀는데(50-60년대에는 평균 4.25%) 성장의 과실은 주로 최상위 계급에 집중되었다. 69년대말 53%를 넘어섰던 노동분배율은 클린튼 집권 8년 동안 잠깐 반등했던 것을 제외하곤 줄곧 떨어져서 현재 45%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상층의 금융자본은 결국 부동산, 주식 거품을 최대한 부풀리는 ‘허구의 성장’을 꾀할 수 밖에 없었다. 스티글리츠의 말 그대로 30년간 우리를 지배한 시장만능의 논리, 신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도, 또 실제로도 허구였다.


부족한 민간소비와 정부지출을 메운 것은 외채와 전쟁이었고 이것은 곧 세 번째의 장기 위기를 불러왔다. 월러스틴, 아리기 등의 세계체제론자들에 따르면 미국의 패권이 발흥한 것은 1873년 경이며 패권이 확립된 것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였다. 이후 70년대 말까지 안정적이던 미국의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90년대 IT붐에 입각한 이른바 ‘신경제’는 미국을 수퍼파워로 부활시킨 듯 했지만 이후 금융화의 급진전과 이라크전은 결국 미국을 좀처럼 헤어날 수 없는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2) 패닉은 진정되었는데 위기는 끝났는가?


일단 세계는 2008년 하반기와 2009년 상반기에 걸친 패닉 상태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가 동시에 유동성을 공급하고 경쟁적으로 케인즈주의적 재정정책을 펼친 예는 자본주의 사상 최초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경상수지적자와 재정적자가 모두 GDP의 6%에 이른 파산상태의 미국경제, 그리고 가장 거대한 국채비율에 시달리는 일본이 이런 대규모 지출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을까? 실제로 오바마는 이미 여러번의 금융스캔들이 드러낸 잘못된 유인구조와 부적절한 규제체계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았다. 예컨대 회계법인은 기업의 분식회계를 도울 유인을 가지고 있고 신용평가회사는 실제보다 높은 평가를 내렸다가 문제가 생기면 한꺼번에 등급을 내려 위기를 촉진하며 경영자들 역시 단기 이익을 추구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제도, 그리고 그램-리치-브릴리 법을 비롯해서 투자은행과 파생상품의 규제를 포기하게 만든 수많은 제도를 바로잡고 연방은행에 시스템 위기의 관리라는 광범위한 목표를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 투자은행과 상업은행을 묶어 지주회사로 편입시키면 오히려 위기가 확대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비책은 마련하고 있을까? 서브프라임 모기지보다 훨씬 규모가 큰 CDS, 회사채, 자동차 채권 등에서도 앞으로 1-2년 내에 추가로 문제가 터질 가능성이 있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보다 더 규모가 큰 상업용 부동산의 값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도 또 한번의 패닉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과연 현재의 미봉적 금융 대책만으로 문제가 해결될까? 스티글리츠의 비유대로 수혈을 아무리 해도 뇌출혈 환자가 건강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근본적으로 월스트리트는 위기의 진원인 동시에, 세계의 자본을 불러 들여 부채를 보전하며또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황금거위인데 오바마는 칼을 대기는 커녕 오히려 거위의 체중을 불리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로 각국 중앙은행이 동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공조에 성공했다. 일단 금융위기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대공황 때와 같은 마비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으며 각국 소비가 급격하게 축소되는 사태를 막았으며 따라서 일부 국가의 수출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모양새를 낳고 있다. 전 세계가 유동성이라는 산소공급기 속에서 숨을 쉬고 있는 형국인데 과연 언제(어느 정도의 버블이 형성됐을 때) 어떤 방식으로(급격한 신용위축을 맞지 않는 방식으로) ‘출구전략’의 공조를 이뤄 내는가가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세계경제의 진로는 바로 이 글로벌 유동성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가라는, 쉽사리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 달려 있다. 특히 미국의 저이자율로 중국, 한국 등 동아시아 국가로 몰려든 달러가 자산거품을 만들고, 그것이 경기회복의 지렛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머지 않아 동아시아가 새로운 진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예고한다.


더 큰 장기적 문제는 현재의 글로벌 불균형과 국제통화체제이다. 1945년에서 71년까지는 금태환을 전제로 하는 달러 페그제로 이른바 트릴레마(자유로운 자본이동, 고정환율제, 독립적인 금융정책 중 두가지 이상을 선택할 수 없다) 중 자유로운 자본이동을 포기한 것이었고, 70년대 중반부터는 셋 중 고정환율제를 포기한 체제로 서로 다르지만 달러가 기축통화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두 체제 모두 강한 달러를 배경으로 A국면에는 유럽의 수출주도성장을, B국면에는 일본과 아시아 닉스, 그리고 이어서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의 수출주도성장을 부추겼다. 모든 기축통화국가는 강한 통화라는 국제질서 유지 비용은 국제수지 악화로 나타난다(트리핀의 딜레마) 문제는 미국의 경상수지가 적자를 넘어 80년대 이래 점점 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데 있다. 앞으로 미국이 금리를 올리든, 아니면 인플레이션으로 대응하든 아시아 국가들이 대외지불준비금(외환보유)을 달러로 보유할 유인은 점점 약해질 것이다. 이번의 금융위기는 이런 상황에 ‘자비의 일격’을 예고했지만 G20, 또는 미국과 중국은 이 문제를 방치하고 있다.





이른바 “포스트브레튼우즈”체제는 아마도 과거 EMS(유럽통화체제)의 복합바스켓제도일테지만 이것이 공식 제도가 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아이켄그린이 예측하는대로 달러와 유로가 사실상의 복수의 기축통화로 기능하다가 여기에 아시아 통화(위앤이나 엔, 또는 아쿠)가 추가되는 정도가 현실적인 경로가 아닐까?


어느 경우든 미국의 달러 패권은 무너진다. 미국의 군사력은 여전히 압도적 우위를 자랑하지만 이라크전에서 보듯이 한 나라를 완전히 제압하기에도 역부족이다. 현재의 10년짜리 위기가 파국까지 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앞으로 꽤 오랜 동안 우리는 지극히 불안정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기존 패권은 무너지고 있지만 신흥 패권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 신자유주의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축적의 원리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1980년대 중반의 플라자협정, 그리고 미일반도체협정을 떠올리며 만만한 나라에 비용을 치르게 하는 단기 해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상대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고민일 테고 훨씬 만만한 상대로 한국이 자동차 등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목숨을 건 환율전쟁, 금리전쟁, 통상마찰, 심지어 군사적 전쟁… 그 한 복판에 한반도가 있다.


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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