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 서론

경제원론 2010. 11. 7. 17:07
* 지금 경향신문 기자들과 함께 하고 있는 경제학 원론 자료입니다. 이 글들을 기초로 해서 "딸을 위한 경제학"을 아주 쉽고, 재미있게 쓸 예정입니다.  너무 길어서 원문을 첨부합니다.




경제학 서론

정태인(경제평론가)


1. 시장의 원리와 한계

(1) 시장과 민주주의(정치)

모든 교과서나 대중서가 그러하듯 시장의 원리에 초점을 맞춰 강의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제는 시장이 아니다. 물론 시장부터 알아야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믿음처럼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면 어찌 세상이 이리 팍팍할 것인가?

시장에서는 기본적으로 1원 1표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시장에서 결코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재용씨는 시장에서 나보다 몇만배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그가 나보다 몇만배의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또 그 정당성은 거의 모두 그가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데서 비롯된다.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것일까?

반면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는다. 이재용씨나 나나 투표함 앞에서는 똑같은 한표를 행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미국 스스로 내세운 자신들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평등할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이재용씨가 언론사를 소유하게 되면(시장에서 돈으로 사면 된다!) 과연 민주주의에 내재해 있는 평등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될까?

그게 위험하다고 판단한다면 뭔가 규제를 해야 한다. 시장과 민주주의는 마주 서서 긴장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달간의 촛불집회에서 나온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다. 광우병 우려의 소, 교육 시장화, 의료민영화,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것은 시장이 민주주의를 훼손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정치, 즉 권력은 경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나 독재 등 정치체제의 유형과 경제성과 간에 선형적인 관계를 설정하기는 어렵지만(예컨대 낮은 경제 발전 단계에서 독재는 경제성장(만이라면)을 촉진할 수 있다), 권력관계를 빼고 경제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2) 시장의 원리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참 희한하게 생각했던 게 있는데 모든 교과서가 하나 같이 소비자 행동에 거의 반 가까운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선호에 관한 복잡한 가정, 예산선과 무차별곡선,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한계효용 균등의 원리 등등 온갖 개념이 여기에서 다 나온다.
그럴듯하지만 또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인데, 이 모두가 수요곡선이 매끄럽게 우하향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공급곡선은 너무나 허망하게도 기업의 (단기) 비용곡선으로 간단하게 설명된다.

단언하지만 수학적 체계를 갖추다 보니 탄생한 이런 복잡한 개념들은 다 잊어도 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다 알아야 한다).
어느 경제학자도 현실 경제를 생각할 때 이 복잡한 도출과정을 떠 올리지 않는다. 다만 우하향하는 수요곡선, 우상향하는 공급곡선, 그리고 두 곡선의 교차점만 알면 된다. 그리고 이 두 곡선의 존재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값이 비싸지면 덜 사려고 할 것이고(우하향하는 수요곡선) 반대로 생산자는 더 많이 팔려고 할 것이다(우상향하는 공급곡선). 그리고 두 곡선이 만나는 곳, 즉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지는 곳에서 균형이 이뤄진다.

수요곡선은 효용극대화(인간은 오직 자기의 (물질적) 만족을 (이기적으로) 극대화한다)의 균형점을 표시하며 공급곡선은 이윤극대화(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한다)의 균형점을 나타낸다. 그리고 둘 사이의 균형은 시장균형이 되며 그 때의 가격이 균형 가격이다.

모든 재화에 대해 이런 균형이 이뤄진다면 모든 사람은 (이기적 욕구를) 만족하게 될 것이다. 소비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만 하면 되고 생산자는 오로지 돈 벌기에 혈안이 되면 그만이다. 그야말로 '되고송'이다. 자기 욕심만 채우면 전 사회는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최고의 상태로 행복해진다(파레토 균형).
이 얼마나 좋은가. 온통 눈에 밟히는 가난한 사람들, 사회 전체를 잊어도 된다. 아니 모두 잊고 자기 이익을 채우는데 일로매진해야 사회는 발전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천박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 경제학자들이 그 쪽으로 몰아갔을 뿐).

시장이론의 힘은 막강하다. 적어도 인간의 본성 중에 이기심이라는 게 존재하면 시장이론은 현실에서 작용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나아가서 사회가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상정해서 구성된다면 인간의 다른 본성은 억압되며 시장이론은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공황직전까지 번성했던 자유주의, 그리고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러나 시장이론만으로 사회를 조직하면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개념에 의해 논리적으로(물론 상쇄력이 언제나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적 경향’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폴라니가 역사의 관찰 속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한 대로 파국이 올 수 밖에 없다.
거칠게 얘기한다면 시장의 경쟁이 낳는 효율화는 언제나 자원을 절약한다. 그러나 그렇게 절약된 자원(노동, 자본)이 다른 곳에 고용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불균형에 빠지고 결국 폭발하게 될 것이다(시장은 극단적 가격변화에 의해 균형을 회복할 것이다).

정치사회적으로는 더 심각하고(사회의 양극화와 불신의 고조),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거의 고려하지 못했던 생태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뿐 아니라 생산력과 자연의 모순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3) 시장의 한계

물론 경제학자들도 시장이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재화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아무도 시장에서 가격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완전경쟁을 가정하는 경제학원론의 전반부까지 이재용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아예 공급조차 되지 않거나(공공재) 너무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외부성이 존재한다고 표현한다)도 비일비재하다.

공공재하면 국방을 떠올리면 된다.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가 나만 빼 놓고 지킬 수 없으며(비배제성), 내가 군대를 믿고 편한 잠을 잔다고 해서 남들이 잠을 못자는 것도 아니다(비경합성). 경제학은 우리에게 사회 전체를 위한다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 군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난 군대가 필요없다. 그러므로 돈을 낼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아무도 군대라는 서비스를 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무임승차) 이 서비스는 시장에서 공급되지 않는다. 치안도 마찬가지이고, 동네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공공재는 국가가 공급하는 게 합리화된다. 그러나 시장만능론자들은 공공재도 부정하기 일쑤다. 부자들은 사설경호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감옥도 민간이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한국에서도 일으키려 애쓰고 있는 민영화 열풍은 경제학의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외부성의 외부란 시장의 바깥을 말한다. 사과꽃 향기는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냄새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사과를 먹고 심하게 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빼고). 그러나 사과꽃 향기에 대해서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다. 만일 사과꽃 향기의 시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꽤 많은 사람이 값을 치렀을 것이고 과수원 주인은 사과를 더 심었을 것이다. 즉 외부선(external good, 외부경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의 경우는 현재의 시장에 맡겨 놓았을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적게 생산된다(뒤집어 말하면 사적 비용이 사회적 비용보다 큰 경우이다). (퀴즈. 잘 생각해 보면 사과꽃 향기는 공공재의 성격을 지녔다. 값을 치르라고 하면 누구나 "난 사과꽃 향기가 싫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볼펜 공장은 외부악(external bad, 외부불경제라고도 한다)을 생산한다. 공해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데 볼펜의 값에는 그게 반영되지 않는다. 즉 외부악이란 시장에 맡겨 놓았을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많이 생산되는 경우이다(이 경우에는 사회적 비용이 사적 비용보다 크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교정할까? 과수원 주인에게 보조금을 주거나 볼펜공장에 벌금을 물리면 된다(피구 해법). 이것이 정통적인 해법이고 많은 나라들이 애용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코즈는 머리를 외로 꼰다. 볼펜공장 주위 사람들의 소유권이 확실하고 피해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면 볼펜공장 주인과 주민들이 협상으로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계산과 협상의 비용이 없으며 원활하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거래비용이 없다)이 붙어 있다. 사과꽃 향기나 공해 시장을 만들거나, 주위 땅을 다 사들이면(내부화)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실 코즈가 주목한 것은 공해배출량 만큼 벌금을 물린다면 당연히 기업은 볼펜을 덜 생산하는 편을 택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볼펜이 덜 생산되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비효용과 공해가 없어져서 우리가 누리는 효용을 비교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볼펜공장 주인이나 주민 누가 계산해도 가장 바람직한 점은 찾아질텐데 그것은 원래의 생산량과 벌금을 물렸을 때의 생산량 사이의 어떤 점일 것이다. 이 점을 찾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코즈의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킨 경제학자들은 이 모두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얘기라며 코즈해법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코즈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기본적으로 거래비용이란 게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기업과 같은 조직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는 한발 더 나아간다. 세상은 외부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유사외부성) 시장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정보의 불완전성). 이 세상에 맛과 모양, 당도가 똑같은 사과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의 사과마다 하나의 시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어떠한 내용이든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시장에 국가나 공동체가 세심하게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스티글리츠 해법).

이외에 독점도 문제가 된다. 만일 이재용씨 혼자 볼펜을 생산한다면 그는 한국 볼펜시장의 수요곡선을 알 수 있게 된다. 완전경쟁이란 어느 볼펜업자도 수요곡선을 알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완전정보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저 시장에서 가격을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가격수용자). 그러나 독점이 되면 그는 가격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보통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적은 양이 높은 가격에 공급된다. 이것도 대표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인데 우리의 현실은 크고 작은 독점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정보의 독점이다. 인류 역사 상 어떤 사회에서도 완전정보의 사회란 없었고 민주주의가 시대의 가치가 된 이후에도 정보는 은밀하게 독점됐다. 시장이 중요한 조정 메커니즘이 된 이후 정보는 더욱 중요해졌다(과거와 달리 확실한,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정보는 손쉽게 부를 쌓는 수단이 되었다). 시장이 정교해질수록 정보의 조작 가능성도 높아졌다. 정보와 행복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근거는 찾을 수 없다.

(4) 시장의 근본적 한계

경제학이 얘기하지 않는 더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수요(demand)곡선에 돈 없는 사람들이 필요(needs)는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에서 지금 가장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는 북한이나 아프리카 어느 나라일 것이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음식쓰레기가 넘쳐 날 정도인데 수요와 공급을 맞춰주는 보이지 않는 손, 시장은 결코 남은 식량을 이들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왜? 간단하다. 그들은 돈이 없다. 에이즈 약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해도, 전체 에이즈 환자의 절반이 넘게 사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다. 시장은, 필요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높은 가격을 제시할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식량과 약이 전달되게 하는 장치인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존재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100% 우연으로 그 나라에 태어났다는 사실, 또는 100% 우연으로 돈 없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데 있다. 식량과 약이 전달되지 않으면 용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생산능력을 제대로 갖출 수 없다. 또 다시 돈을 벌지 못한다. 그 아이들은 더 굶주리고 병에 더 많이 걸린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최초에 얼마나 돈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가 인생을 거의 다 결정한다면 그게 어찌 살만한 세상일 것인가? 경제학자들 말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만들면 만들수록 이런 불합리는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교육을 시장에 맡기고 건강보험을 민간보험으로 대체하면 양극화는 극단으로 진행될 것이다.

남들과 함께 더불어 잘사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을 가르치는 경제학은 없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즉 현재의 경제학은 극복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출발선에서는 똑같아야 한다. 나아가서 애초에 체력이 떨어진다거나 뜀뛰기에 좋지 않은 신체를 타고 태어난 사람은 남들보다 더 몇발자국 앞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 의료, 주거, 식량, 환경은 모두에게 골고루 제공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공공성을 이룬다. 얼마의 양을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 것인지를 따져서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자들이 할 일이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합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국 갈갈이 찢어지게 되고 시장만능론자들이 목청껏 외치는 국가경쟁력도 형편없이 떨어지게 된다.

한 때 유토피아라고 불렸던 그 사회의 원리를 찾아내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5) 국가의 한계

시장이론의 탄생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영글었다. 맑스는 시장의 무정부성을 통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맞을 수 밖에 없고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낭비(자본의 폐기와 실업)가 뒤따른다. 만일 이러한 낭비를 줄이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생산과 소비, 인간의 욕구와 충족 정도에 대한 정밀한 계산이 즉각 가능하다는, 사회주의의 전제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시장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즉각 그러한 계산을 해 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그런 계산을 해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시장으로 이르는 길”(원제는 “사회주의는 어디로(Whither the Socialism?))에서 예리하게 집어냈듯이 시장만능론과 국가만능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보이다. 내가 나의 욕구를 잘 모른다면 시장이론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셈인데 그러한 욕구의 합을 계산해내서 사회 전체의 욕구와 생산능력을 국가가 알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1917년부터 시작되어 1989년에 막을 내린 ‘국가사회주의’는 이른바 사회주의 계산문제와 유인의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흥미롭게도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약 30-40년간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모두 1950-60년대까지 높은 경제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소련의 경우 미국의 포드주의 생산체제를 거의 그대로 이식했는데 노동자들은 혁명의 열기 속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미국보다 생산성이 높은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가 식고 인간의 본성 중 일부인 이기심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체제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중앙계획국(소련의 경우 GOSPLAN)이 당신의 욕구에 관해 질문하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신은 1년에 구두 두켤레가 꼭 필요한데 과거에 가죽의 부족으로 또는 정전 사태로 불가피하게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필요의 1/2만, 즉 당신의 경우에는 한 켤레만 공급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네 켤레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이건 특별히 당신이 사악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그렇게 행동할 것이 뻔한데 나만 두켤레라고 솔직해 대답해서 맨발로 지낼 수야 없지 않은가?

생산능력에 관한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우리 공장의 생산능력은 1년에 최대 1천켤레이다. 그러나 원자재의 공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우면 700켤레밖에 생산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300켤레의 부족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을 대비해서 700켤레가 내 최대생산량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즉 소비에 관해서는 과장보고를, 그리고 생산능력에 관해서는 과소보고를 할 유인이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 정보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고 자원의 배분은 잘못된다.

노동자로서도 마찬가지다. 10명이 집단농장에서 공동으로 밀을 10톤 생산해서 똑같이 1톤씩 나눠가지는 경제에서 이기적 인간은 완전히 노는 선택을 할 수 있다. 9톤이 생산되어 0.9톤을 배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9명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 역시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에서는 웬만하면 기업이 도산하지 않는다. 관료는 기업을 도산시켜서 책임을 지는 쪽보다 보조금을 줘서 살리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비효율화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물론 이 모든 경우에 조사와 감시를 통해 이런 왜곡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행정 및 통제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의 실패, 또는 정부 실패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회가 가능한 것일까?

2. 사회적 딜레마와 그 해법 - 인간이 협력할 조건

(1) 사회적 딜레마

우리는 위에서 경제학자들이 외부성과 공공재, 독점 등을 시장실패로 인정한다는 것을 보았고 스티글리츠는 이 세상은 ‘유사 외부성’으로 가득차 있으므로 시장은 원천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까지 말했다.

이기적 인간이 자신의 목적(수요곡선을 이루는 효용극대화, 공급곡선을 이루는 이윤극대화)을 추구하기만 하면 바람직한 사회적 목표가 달성될 수 있다는 단순한, 그러나 강력한 통찰(위에서 본 바대로 그림은 아주 간단하고 그 의미는 강력하다)에 맞서 역시 단순한 하나의 게임이 위 가정에 근본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로 알려진 존 내쉬가 유명한 “죄수의 딜레마”의 해법을 제시하고 이것은 언제나 사회적으로 열등한 해가 된다고 갈파한 것이다. 이 죄수의 딜레마는 “공유지의 비극”, “집단행동의 문제”, 즉 사회적 딜레마를 설명하는 기본 원리가 된다.

이런 사회적 딜레마의 해법은 협력이다. 생물계와 인간 사회에서도 협력은 광범하게, 또 지속적으로 관찰된다. 어떤 경우에 협력은 일어나는가?

(2) 협력 진화의 다섯가지 규칙

하버드대의 생물학 및 수학과 교수인 노박(Nowak, '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 "Science", 2007, V314)은 협력이 진화할 수 있는 5가지 규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머니의 가이 없는 사랑’에서 찾았던 “혈연 선택”입니다. 꿀벌이나 흰개미,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광범하게 관찰할 수 있는 협력, 그것도 자신을 희생하는 협력의 많은 부분은 핏줄 때문이라는 거죠. 전설적인 생물학자 할데인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면 1/2의 확률로 자신의 유전자를 살리는 것이고 조카를 구하면 1/8의 확률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직관적으로 금방 이해되는 주장입니다. 유명한 해밀턴의 규칙, b/c > 1/r가 적용됩니다. b는 협력이 가져오는 이익, c는 협력자가 치러야 하는 비용, 그리고 여기서 1/r은 우리 말로 치면 촌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입니다. 촌수가 가까울수록, 그리고 비용이 적고 이익이 클수록 협력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은 거죠. 그러나 현실에서 아주 친한 친구라도 촌수는 무한대일 겁니다. 그래도 외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 사람이 그렇게 반갑고 동향이라고 서로 돕는 건 혈연선택의 위력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릅니다.

둘째는 ‘직접 상호성’(direct reciprocity)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가 단골의 예에서 찾은 겁니다. 앞으로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기를 치면(무임승차하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손해라는 얘기죠. 이미 이 책에서도 몇번 소개한 죄수의 딜레마를 잠깐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상대방이 자백을 하건, 아니면 비밀을 지키건 나는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되니 둘 다 자백을 하게 되고 결국 협력의 이익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사교육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협력(우리 모두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얼마나 행복해질까요?)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게임을 무한히 반복한다면(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 협력하는 게 유리합니다. 즉 맞대면하는 관계에서는 다시 만날 확률(게임이 반복될 확률=w)이 협력을 결정합니다. 즉 b/c > 1/w라는 관계가 성립합니다. 역시 협력의 이익이 크고 비용이 적다면, 그리고 게임이 반복될 확률이 충분히 크면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협력을 하는 게 유리합니다. 즉 이기적이기 때문에 협력을 하는 셈입니다. 트리버스라는 유명한 생물학자는 이런 관계를 ‘상호적 이타성’이라고 불렀죠. 부품 업체와 장기 거래를 하고 경기가 나쁘다고 바로 해고를 하지 않는 과거의 일본 기업가가 대충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전략은 전에 소개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TFT)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모두 협력을 하는 관계가 되면 그 다음은 그냥 “고생 끝, 행복 시작”일까요? 만일 집단 안에서 이기주의자가 생기거나(돌연변이) 밖에서 들어온다면(침입)? 이번 달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셋째는 ‘간접 상호성’(indirect reciprocity)입니다. 사실 우리가 두 번 이상 만나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요? 그렇다면 직접 상호성에 의해서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협력을 설명하는 건 아주 제한적입니다. 항상 남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도움을 주고 싶을 겁니다. 또 어떤 이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곧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겠죠(안 그러면? 나쁜 놈이죠) 이런 협력이 일어난다면 그건 평판, 명성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간접 상호성은 주로 평판에 의해 유지된다는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눈도 늘 의식하고 우리가 술자리에서 하는 ‘뒷담화’(gossip)는 곧잘 어떤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평판을 좋게 유지하는 게 유리합니다. 말하자면 쓰리쿠션으로 협력을 자아낸다고나 할까요? 이 경우도 역시 자신의 장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셈입니다. 간접 상호성이 협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b/c > 1/q (q는 상대의 평판을 정확히 알 수 있는 확률)를 만족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정확히 알려져 있는 사회에서 협력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누굴 만나건 늘 협력을 하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평판은 어떨까요? 물론 좋겠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기주의자가 숨쉴 공간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임승차자에 대해선 TFT 전략대로 무임승차로 응징하는 게 올바른 행동일까요? 그런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또 어떨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에 대해 아무런 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긴 모든 사람은 나머지 모든 사람과 같은 확률로 만나서 협력을 할 것인지, 무임승차(배반)을 할 것인지 결정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실험들도 역시 상대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채 만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나타났듯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지지 정당이 확연히 다릅니다(다행히 많이 약해지고 있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여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집단 차원의 선택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게 오늘 할 얘기입니다.

네 번째 규칙은 네트워크 상호성(network reciprocity)입니다. 최근 최정규교수의 논문에서는 ‘국지적 상호작용’이라고 옮겨 놓았습니다(최정규, 양재석, 조항현(2006), “구별짓기와 협조적 공진화”, 제1회 복잡계 컨퍼런스.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는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유유상종”이 유사한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처럼 협력자와 무임승차자가 골고루 섞여있는 사회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면 무조건 무임승차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현실의 공간 구조나 사회적 네트워크에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공간구조의 분석은 무한대의 경우의 수를 가지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분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간단한 몇가지 가정을 한 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 보면 ‘네트워크 외부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고루 섞인 상태에서는 완전히 소멸할 수 밖에 없었던 협력자들이 네트워크 클러스터를 형성해서 살아남고 그 클러스터의 힘을 바탕으로 무임승차자들의 영역을 정복해 나갑니다. 협력자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당연히 이익이 크고 남한테 당하는 착취는 없을테니까요.

여기서 관찰되는 규칙은 또 다시 b/c>k (k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평균)입니다(수학적으로는 모집단이 크고 약한 선택이 일어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즉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을수록 협력은 촉진됩니다. 조금 이상한 얘길 수 있지만 거꾸로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모든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곧 골고루 섞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니까요.

제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지 못하고 이 쪽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그렇지만 이 네트워크 상호성은 일반적인 산업 클러스터 이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려 한다든가, 귀농에 성공하기 위해서 이미 형성된 공동체에 들어 간다든가 몇 명이 같이 움직인다든가 하는 것이 아마도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어쩌면 미국보다도 더 무임승차자로 가득찬 사회인데 이 곳을 떠나서 어디 괜찮은 사람끼리 모여 살 수 없을까, 가끔 꿈구는 것도 이 네 번째 협력 규칙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번째입니다. 집단 선택이라는 겁니다. 골고루 섞여 있는 한 집단 내에서 협력자들은 소멸합니다.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들도 무임승차자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이 있다면 이 집단은 무임승차자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적합도(fitness)가 높을 겁니다(요즘 용어로 경쟁력이 높을 겁니다). 예를 들어 희생정신이 강한 투사들이 모인 스파르타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즉 여기서는 두 차원의 선택이 일어나는 겁니다. 집단 내 선택(저차원)에서는 무임승차자가 생존하지만 집단 간 선택(고차원)에서는 협력자들이 유리합니다. 만일 집단 내에서는 협력자가 지지만 협력적 집단이 승리한다면 전체적으로 협력자들이 더 많은 사회가 될 수도 있겠죠. 이론 모형에서는 빠르게 성장한 집단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분화하고 뒤쳐진 집단이 소멸하는 걸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고대 사회처럼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없애는 경우도 상정할 수도 있고, 현대의 상황이라면 어떤 집단이 협력자 집단을 흉내낼 수도 있겠죠. 현실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여 살 수 있다면(assortation, 최정규교수는 유유상종으로 번역) 집단 선택은 현실에서도 관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약한선택과 희소한 집단 분화를 가정하면 또 다시 앞에 나온 네 공식과 유사한 b/c > 1+(n/m) (n은 집단의 최대 크기, m은 집단의 수)이 성립합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한 집단의 평균 인구가 적을수록 협력이 잘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것도 거꾸로 유추하면 이해됩니다. 한 집단의 평균 인구가 제일 큰 경우는 모두가 한 집단인데 이건 협력자가 소멸하는 상황과 똑같으니까요.

(3) 정리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서 인간이 협력할 조건을 임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규칙의 좌변에 나온 b/c부터 보면 당연히 b가 클수록, 또 c가 적을수록 협력이 일어날 확률은 높아집니다. 즉 협력자로부터 여러 사람이 얻는 이익이 클수록, 그리고 협력자가 치르는 희생이 적을수록 협력 행위가 많아지는 거죠.

다음 우변을 보면 차례로 피가 많이 섞일수록(싸이나 블로그의 촌수도 마찬가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이 높을수록(게임이 반복될 확률이 높을수록), 그리고 사람들의 평판이 잘 알려져 있을수록(만날 사람이 협력자인지 무임승차자인지 잘 알 수 있을수록),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집단의 구성원이 적어서 협력자 집단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을수록 그 사회는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또 하나, 이런 논리적 추론에 따르면 완벽하게 협력자들로만 이뤄진 아름다운 세상은 또한 유토피아입니다. 그런 사회에 돌연변이나 이주(migration)에 의해서 무임승차자가 나타나는 순간 또 다시 세상은 이기적 인간으로 가득찬 무한 경쟁의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위의 규칙과 다른 여러 특성을 반영해서 사회의 규범, 법률, 제도가 잘 만들어진다면 협력적인 사회가 꽤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음 달에는 협동조합 중소기업 위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 관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경제학’(이 말 자체가 이 지역인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가 쓴 용어입니다)이 이뤄진 사회라고나 할까요? 인간 본성에 관한 의문은 무궁무진합니다. 만일 그 답이 있다면 신학과 철학은 이미 없어졌겠지요^^. 사실 우리가 가장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더라도 어찌 인간과 역사를 꿰뚫을 수 있을까요? 우리의 무지, 불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출발점입니다.

3. 시장과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 정책 대안 - 세박자 경제론

(1) 세박자 경제론

유럽에서 1970년대 중반 “사회경제”라는 용어가 다시 등장한 것은 앙리 드로쉬와 클로드 비네가 오랜 전통의 협동조합, 상호회사와 결사체들의 공통점을 “이론화”하려는 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Laville et. al., 2004). 사회경제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대단히 다양한 모습을 띄었기 때문에 이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회경제의 핵심 요소인 협동조합에 대한 논의는 대단히 역사가 깊다. 맑스, 레닌, 그람시 등 좌파 이론가들은 전통적으로 협동조합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엥겔스는(따라서 맑스도)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에서 협동조합운동의 의의와 역할을 명시적으로 부정했지만 맑스는 자본론 곳곳에서 협동조합을 유력한 이행 대안 중 하나로 상정했다. 레닌도 신경제정책 이후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그람시는 협동조합이 강한 이탈리아의 상황에 영향을 받아 진지전의 유력한 물적 토대로 협동조합을 상정했다.

자유주의 경제학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길드 사회주의 등의 영향을 받은 존스튜어트 밀, 그리고 개혁적 케인즈주의자 미드 등은 물론 한계혁명의 왈라스까지도 협동조합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예컨대 밀의 다음과 같은 문장은 협동조합에 대한 당시 경제학자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협동조합 등;역자) 결사체 형태(the form of association)는, 인류가 계속 발전시킨다면 결국 세상을 지배할 것임에 틀림없다...노동자 자신의 결사체가 평등, 자본의 집단적 소유를 기초로, 스스로 선출하고 또한 바꿀 수 있는 경영자와 함께 자신의 일을 수행하는 형태이다.”(Mill, 1871, Meade,1989, p ix에서 재인용)

따라서 사회경제라는 개념을 어떤 이데올로기적 전통과 곧바로 연결시킬 수는 없다. 멜니크는 협동조합의 자유민주주의 전통, 맑스주의 전통, 사회주의 전통, 공동체주의 전통을 모두 찾아냈다. 국제협동조합(ICA)는 어떤 정치적 성향도 거부했었고 한국의 생협운동 또한 정치적 중립을 표방하고 있다. 협동조합의 이런 측면은, 최근 중국에서 협동조합운동이 시민사회를 만들어내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되도록 정부나 이데올로기와 부딪히지 않은 채 온건한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Zhao, 2009). 이것은 협동조합의 배경으로서의 사회경제, 또 시민사회가 대단히 넓은 외연을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2년 전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 당시 “세박자 경제론”을 제출한 바 있다. 당시에 명확히 인식하지 못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폴라니의 시장, 재분배, 호혜라는 세가지 사회통합 양식은 세박자 경제론의 직접적 이론 자원이 될 수 있다. 이렇게 경제를 세 영역으로 나눠서 보는 관점은 EU나 캐나다의 사회경제 정의에서도 일반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재단이나 자선의 전통이 강한 미국의 샐러먼은 “시민사회”라는 용어로 비영리부문, 또는 제3섹터를 표현한다.

<그림1> 세박자 경제론 개요

한편 이탈리아에서 주로 쓰는 “시민경제”(civil economy, Zamagni, 2004, 2005, Porta ed, 2004 등 참조)와 프랑스의 “연대경제”(solidarity economy) 역시 사회경제를 설명하는 데 널리 쓰인다. 이들 이론은 위의 그림처럼 사회경제 영역의 독자성을 인정하지만 전략적으로는 시민사회나 시민정신에 의한 전체 사회의 재편이라는 관점을 택하며 별도의 사회경제 전략을 취하는 데 반대한다. 이들 용어는 18-19세기 유럽의 논쟁, 예컨대 프랑스의 공화주의논쟁이나 영국의 시민의식(citizenship) 논쟁을 반영하고 있다. 이 관점을 택한다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 운동(이론)이나 영미형의 사회투자정책(사회투자국가론) 등도 모두 사회 전체의 전체 변화를 표현하는 현상들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세 영역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사회경제 영역을 독자적으로 키워서 사회통합과 지역발전을 꾀하려는 정책, 나아가서 이들 영역에 기초한 전체 경제의 민주화를 노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캐나다의 사회경제 이론가들이 이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사회경제의 미시적 기초

위의 그림에서 시장경제의 원리는 주류경제학에서 경쟁(또 그에 따른 등가교환)에 의한 효율성의 달성이라는 일반균형이론으로 정식화됐다. 또한 국가부문 역시 재분배의 이론으로 ‘사회적 선택 이론’이나 케인스주의 정책에서 주로 다뤄졌다. 아주 거칠게 얘기한다면 국가사회주의는 국가 부문의 원리에 의한 사회의 전일화,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시장부문의 원리에 의한 전일화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경제의 독자적 원리는 어떻게 상정할 수 있을까? 사회경제론, 시민경제론, 연대경제론 모두 인간 행동의 원리로 ‘상호성’(reciprocity)을 거론하고, 사회경제가 지향하는 가치로 ‘연대’(solidarity)를 꼽는 것은 흥미롭다. 이런 사고는 폴라니에게서도 찾을 수 있지만 체계적인 논리연관은 명확하지 않다.

최근의 이론가들 중 일부는 실험경제학/진화경제학에서 요즘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상호성’을 사회경제와 연관시키고 있다. 보울스 등 이 진영의 선구자들이 스스로의 상호성이론을 사회경제와 직접 연관시킨 바는 없으나 이미 그 맥락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회자본’이나 ‘네트워크 외부성’을 논리적으로 연관시킨다면 사회경제의 미시적 기초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모른다. 상호성 및 사회자본 이론이 지금 한창 발전하고 있는 이론이므로 그럴 가능성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Fong et.al. 참조).

인간이 과연 경제학이 상정하는 것처럼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행동하는가(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물질적 이익만 추구하는가)에 관한 최후통첩게임, 독재자게임, 공공재 게임 등의 실험은 회의적인 결과를 낳았다. 인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언대로 ‘사회적 동물’이어서 자신에게 대가가 돌아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도 남의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하며(상호성) 상대가 도를 지나치다고 판단할 때는 자신의 손해를 무릅쓰고서라도 응징을 한다(강한 상호성). 비약을 무릅쓴다면 인간은 적절한 환경 하에서 서로를 위하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국가가 직접 개입하지 않더라도 모두를 위한 공공재를 스스로 제공할지도 모른다. 프랑스혁명의 3대 정신 중 상대적으로 빈약하게 취급된 연대의 근거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200여년에 걸쳐 호모 에코노미쿠스 가정에 맞춰 형성된 사회제도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고 최근에 다시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협동조합이 이런 연대의 경제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는 인간이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 이익을 위해서도 동기 부여를 할 수 있다는 점만 짚어 두고 넘어간다. 최소한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이타적일 수 있다.

상호성은 공공재게임에서 암시하듯 사회자본(퍼트넘)을 형성하는 원리일 수 있다. 또한 이 상호성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외부성’(externality), 즉 시장이 공급하지 못하는 바깥 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즉 사회자본이란 네트워크 외부성의 결과인데 협동조합 등 사회경제의 요소들은 의식적으로, 또는 규범적으로 외부성, 또는 흘러넘침효과(spill over effect)를 추구한다. 예컨대 협동조합의 원칙 중 하나인 교육은 고용인 뿐 아니라 사용자, 그리고 공동체 성원까지도 포괄하며 협동조합의 네트워크화 역시 기업 능력의 외부화에 기여한다.

물론 네트워크화한 시장경제, 예컨대 자본주의기업으로 구성된 클러스터에서도 이런 흘러넘침은 발생한다. 도식화하자면 시장경제에서는 인간자본과 금융자본의 축적을 통해 간접적으로 효과가 발생하며 시장경제의 경쟁 논리는 의도적으로 외부효과를 내부화하거나 밖으로 흘러넘치지 않도록 단속하는 반면 사회경제는 신뢰와 규범, 시민의식과 리더십 등 사회자본을 축적함으로써 더 포괄적이고 직접적으로 공동체에 기여한다. 이러한 사회자본은 집합행동의 거래비용을 낮춤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한다.(Zeuli & Radel, 2005, Putnum, 2000 참조) 사회자본은 사회적 승수효과(social multiplier effect, Glaeser et.al. 2002)를 통해 경제를 성장시킨다. 구체적으로 사회경제는 실업이나 자연파괴 등의 사회적 비용을 효과적으로 줄이고 사람들의 사회경제적 복지를 증진시킴으로써 장기의 저축을 증가시킨다(Chantier, 2005) .

다윈이 지적했듯이 연대와 협동은 경쟁보다 우월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사회경제는 상호성에 입각해서 연대라는 가치를 추구한다. 이는 현재 전 세계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인 사회 통합, 그리고 고용을 동반하는 성장에 사회경제가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2) 시장경제, 공공경제, 사회경제의 상호 관계

1. 공공경제 및 시장경제와의 관계 - 보완성의 제도화

사회경제의 발전에 시장경제 및 공공경제와의 관계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사회경제는 그 비중이 적으므로 시장가격의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경제의 비중이 커지는 경우 시장가격을 억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경제는 사회자본을 공급하므로 시장경제의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 소비자협동조합은 제품의 질을 보장함으로써 소비자 교육과 보호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즉 사회경제는 가격이라는 면에서 시장경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지만 시장경제에 대해서 대안적 경영의 준거가 될 수 있다.

한편 자본주의 역사가 증명하듯 강력한 이윤동기는 여러 측면의 혁신을 이뤄낸다. 이에 비해 ‘연대동기’는 새로운 수요, 새로운 상품의 창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시장경제에 뒤질 수 있다. 따라서 시장경제에서 일어난 기술 및 제도혁신을 사회경제로 수용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에밀리아 로마냐나 몬드라곤이 R&D나 교육을 강조하고 네트워크의 핵심조직으로 대학과 연구소를 세우는 것은 이런 점과 무관하지 않다. 즉 사회경제는 시장경제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동행하거나 보완하는 존재이며 시장경제의 양극화 작용을 억제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회경제의 규모와 형태는 나라에 따라 매우 다양하며, 공공경제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복지 유형에 따라 국가, 또는 공공경제와 사회경제의 관계도 상이하게 나타난다 . 복지시스템과 사회경제의 관계에 관해서는 세가지 가설이 있다(Salamon & Anheier, 2005). 첫째는 이질성이론(heterogeneity theory)인데 시장실패와 국가실패가 동시에 발생한 곳에 비영리부문(사회경제)이 존재한다는 주장이다. 국가실패란 다수결 원리에 의해 선택되지 못한 부문에 복지가 공급되지 않을 가능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질적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소수자에 대한 복지는 적을 것이고, 동시에 비영리부문은 클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경제의 존재에는 대단히 다양한 요인이 작용할 수 있으므로 이런 추론은 실증적으로 기각된다(Salamon et.al, 2000, Salamon et.al. 2003). 이 주장은 일단 미국을 염두에 둔 것이겠지만 인종문제가 심각한 후진국에는 두가지 실패가 모두 존재하면서도 비영리부문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둘째로 상호의존론(interdependence theory)은 비영리단체가 국가의 영역에서 활동하지만 국가보다 속도가 빠르고 국가의 개입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발성의 실패”(voluntary failure) 때문에, 즉 동원 가능한 자원의 부족(“자선의 부족” ,phillanthropie insufficiency"이나 “자선의 가부장성”, phillanthropic parochialism) 때문에 비영리 부문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국가는 여전히 필요하다. 셋째는 사회적 기원론(social origin theory)이다. 이 가설은 배링턴 무어의 민주주의론, 에스핑 앤더슨의 복지국가 유형론을 전거 삼아서 각국 사회계급과 제도의 역사적 궤적에 따라 국가와 비영리부문 간의 관계를 유형화한다.

<표3> 복지국가유형과 비영리부문의 규모

정부의 사회복지 지출

비영리 부분의 규모

적음

많음

낮음

국가주의(statist)

일본, 중남미국가

자유주의(liberalist)

미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영미형 국가

높음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tic)

핀란드 오스트리아

조합주의(corporatist)

독일, 프랑스, 네델란드

Salamon, Sokolowsky,Anheier, 2000, p15(표3)와 p18(그림7)에서 재구성

대체로 유럽국가들은 사회경제의 전통이 강해서 국가의 사회복지 전달체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역사적 이유), 사회복지 지출이 많아도 소득수준이 높아서 사회경제의 재원조달이 일정 규모를 유지할 수 있으며(경제적 이유) 종교와 시민정신에 따라 자선 등이 활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사회적 이유). 사회민주주의 모델보다 조합주의 모델의 비영리부문이 더 큰 것은 20세기 초중반에 노동계급 정당에 의해 철저한 복지개혁이 이뤄지기 보다 각 계급의 타협에 따라 전통적 사회경제(구사회경제)가 ‘잔존’해서 복지의 전달체계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모형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요인에 따라 정부의 개입을 최소로 억제한 가운데, 개인의 자발성에 의해 사회문제를 일정하게 해결하는 경우로 사회복지와 비영리부문이 일정 정도 대체관계를 보인다.

물론 한국은 국가주의유형에 속한다. 1960-80년대 중반의 개발 동안에 국가는 경제발전에 재원을 집중했고 사회복지를 공동체(60년대)와 가족(70-80년대)이 떠맡은 결과 지역공동체가 붕괴 상태에 이르렀고, 국민소득이 일정 수준에 다다른 후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여전히 사회복지가 최소한으로 제약되는 동시에 사회경제 역시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경우이다. 나는 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이 한국의 자생적 사회경제를 완전히 뿌리뽑았다고 생각한다. 일제 시대인 1920-30년대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공동체 내의 각종 협동조합, 상호공제회, 두레 등이 총독부와 관제 협동조합에 의해 해산당했고 1960년대에 부활한 민간 협동조합(신협, 소비조합) 운동은 새마을운동(새마을금고 포함)에 의해 사실상 제거되었다.

한편 한국의 교육이나 의료복지의 확대는 공적 보조금을 받아 시장경제가 전달하는 경로를 따랐다. 1990년대 중반 이래의 ‘시장화’ 기조 속에서 병원이나 학교 등 사적 조달의 주체들은 스스로의 이익 추구를 위해 미국식 제도를 요구하면서도 국가의 보조는 지속되거나 확대되기를 원하는 일견 모순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반대 진영은 공교육, 공공 의료기관의 확대와 함께 학부모나 환자 등 수요자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만일 사적 방식이 사회경제의 방식으로 바뀔 수 있다면(또는 사회경제의 비중이 높아진다면) 공공성과 수요자의 참여를 동시에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한국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유형과 조합주의 유형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의 취약한 사회경제는 기능적으로 공공경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예컨대 한전이 재생에너지 사회적기업의 전기를 사들이는 것, 건강보험시스템이 인두당 수가제를 도입하여 의료생협의 수입을 보조하는 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공공경제와 사회경제는 상생의 보완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 특히 공공보조금으로 운영되는 사적기관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서비스 분야(의료나 보육, 교육)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예컨대 공공부문 민영화의 일종이었던 PPP(Private Public Partnership)을 다른 의미의 PPP(People Public Partnership), 또는 CPP(Citizen Public Partnership)으로 바꿔낼 수 있다. 또한 독일의 2차 노동시장의 역할이 그렇듯, “사회경제영역의 잠재적 고용 능력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주요 주체”(Birkholzer, 2005)이다. 사회경제는 정의상 일자리의 창출에 적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도설계를 잘 하면 공동체, 시장, 그리고 국가는 서로 대체적인 관계가 아니라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Bowles & Gintis, 2002)” 따라서 사회경제의 제도화(예컨대 한국의 협동조합법 제정)는 두 영역과의 보완성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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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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