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잡상 - 진보시즌2 단상 다섯번째

 

정태인(통합진보당 당원)

 

1. 두 개의 삽화

 

“애국가를 왜 안 부르는가” 유시민의 얘기다. 원래 유시민은 개인주의적/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한 친구다. “Why not?". 폭압적인 고교시절, 박정희 독재의 치떨리는 기억은 유시민이 애써서 집단주의를 거부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70년대 말-80년대 초에는 저녁 5시에 국기하강식이라는 게 있었고, 길을 가던 사람들은 모두 제 자리에 서서 애국가를 들어야 했다. 어느 날 다섯시, 그저 습관처럼 사람들은 나무가 되었는데 부러 명랑하게 떠들며 사람들의 숲을 헤집는 학생들이 있었다. 제일 목소리 큰 사람이 유시민이었다.

 

“애국가를 부르라고 강요하는 건 전체주의다” 이석기의 말이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유시민과 달리, 이석기에 대해서 난 아무 것도 모른다(사실 몇만 당원, 5천만 국민 중 그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두 번째 삽화는 그의 얘기가 아닐 수도 있다. 구 민주노동당 남원 연수원 원장의 경험담에 따르면 이른바 “자주파”와 “평등파”는 연수 태도도 아주 달랐다고 한다. 자주파는 아침 7시면 운동장에 정렬해서 조회를 하는 모범생들이었고 평등파는 문제아들이었다. 이런 특성은 김창현과 조승수가 맞붙은 2009년 울산북구 보궐선거에서도 관찰할 수 있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은 제자리를 지키면서 열심히 구호를 외쳤지만 진보신당 당원들은 그야말로 “미음완보”를 즐겼다.

 

말하자면 이 둘은 동시에 돌변한 것이다. 유시민이야 국민들의 눈높이를 고려한 것일테고 이석기야 이데올로기공세에 맞서기 위한 것일테지만... 어쨌든 개인, 그리고 정파의 성향과는 사뭇 어긋나는 주장을 하는 것임엔 틀림없다.




 


2. 진보의 발전?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다(내심을 말하자면 재미있어 한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이들이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정치가가 되었다는 점도 그렇지만 정파 지도자로서의 이런 변화는 바람직하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기실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자유주의 전통과 공화주의 전통은 서구에서 참으로 오랜 논쟁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 두 이념의 (모순적) 결합이기 때문이다. 오죽 했으면 발리바르가 “평등자유”(equaliberty)라는 말을 만들었을까? 기본권(칸트)와 일반의지(루소)의 대립, 그리고 최근의 정치 철학 논쟁 역시 이 이 영원한(할) 대립의 결과니까...

 

경제학에서 이 문제는 “사회 선택이론”을 탄생시켰다. 개인의 선호를 사회적 선호로 집계하는 것이 가능할까? 천재 애로우는 “불가능성 정리”를 증명해서 사람들을 절망시켰다^^. (그의 이 결론은 선호에 관한 경제학의 빡빡한 가정들과 민주주의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개의 공리로부터 도출된 것인데 어떤 경우든 4개의 가정 중 하나 이상을 위배할 수 밖에 없고 현실적으론 독재가 가장 편한 해결수단이 된다. 물론 이런 가정 중에 한두개를 완화하면 훨씬 그럴듯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예컨대 센은 “선호의 비교” 를 도입해서 민주주의의 공리와 평등을 양립시키려고 했다).

 

20세기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진보파는 이 문제를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와 “민주집중제”로 해결했다.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가 민주주의적 토론을 거쳐 결론에 이르면(집계) 일사분란하게 실행하면 그만이다. 물론 국내의 ‘반혁명’ 세력이 엄존하고 국제적으로는 전쟁의 와중이었으니 상황이 이런 제도를 강요했다고도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역사는 이 집중의 과정이 별로 민주적이지 않았고 결국 비효율과 특권을 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세계의 어떤 진보주의자도 이 두 주장을 내놓고 하지는 않는다. 주체사상의 수령론은 거의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플롤레타리아 독재/민주집중제의 ‘아시아적/한반도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중국의 일당 독재 역시 10년 내에 다당제로 변화할 것이 틀림없을 테고 그 시점은 다음 경제위기 때가 될 것이다. (전공이 아니라 진지하게 들여다 볼 시간이 없지만 난 유신헌법, 국민교육헌장과 주체사상은 매우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들 주장이 나온 시대적 배경, 두 정권의 필요는 동일하다)

 

이 문제는 (당연히) 현재 통합진보당, 아니 진보 전체가 맞닥뜨린 문제이기도 하다. 기실 진보정당의 민주주의는 ‘민주집중제’를 “선거집중제”로 해석한 최악의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우리는 당내에서 개인의 자유(의사)와 전체의 의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바로 민주주의의 본연의 문제이다. 난 자유주의적 성향의 정파가 집단에 관한 성찰을 통해, 예컨대 집단정체성을 위한 의식의 필요성을 받아들이고 집단주의적 성향의 정파가 개인의 자유, 기본권을 내세운 것이 단지 정치적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이 문제에 관해 현재 잠정적으로 다다른 결론이 다원적 민주주의와 소통에 의한 합의, 공공이성(또는 집단지성)의 가능성 정도가 아닐까? 서로의 의견을 진정으로 존중하고 토론에 의해서 (잠정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어야, 비로소 (진보) 정당이 제대로 서고 또 발전할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현재의 고된 진통은 이런 기본적 문제를 되짚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당내 신뢰, 그리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만한 민주주의적 원리와 제도를 갖게 된다면 현재의 절망은 어느 젓 축복으로 변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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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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