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패배 후, 주간경향 원고를 바꾸기 위해 쓴 글입니다. 광주행 기차 시간에 쫓겨 마무리하지 못한 채 결국 펑크를 냈죠. 일단 제 블로그에 올립니다. 


“세대간 착취”(intergenerational exploitation)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88만원 세대”가 베이비붐 세대에 졌다. 53년 한국전쟁이 끝나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아이를 낳았다. 하여 55년생부터 63년생까지 한국의 50대는 가장 많은 인구를 자랑한다. 이들이 박근혜당선인에게 표를 몰아 주었다. 나(60년생)도 포함된 이 세대는 앞으로 점점 더 막강한 힘을 발휘할 것이다.

 

이들 대부분은 어렸을 때 배고픔을 경험했지만 그들의 부모세대처럼 죽음을 넘나들지는 않았다. 10대와 20대 청년기 때는 고도성장의 과실을 맛 보았다. 이들 중 일부는 목숨을 건 학생운동을 했고 당시로선 특권이었던 대학생 신분을 포기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들의 이타적 행동은 같은 세대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독재 속에서 성장은 30대까지 지속됐고(학자들은 “발전국가”라고 부른다) 웬만해선 취직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독재 속에서도 희망이 활활 타오르던 시대를 살았다.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지주계급이 소멸됐고 보편 교육으로 인해 사회적 이동이 가장 활발했다. 누구나 노력하면 신분의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고 통계 상으로 그러했다. 대학을 나온 친구들도 그랬지만 일찍이 자영업이나 중소기업에 뛰어든 친구들도 꽤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

 

동시에 이 세대는 자신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경쟁에도 뛰어들었다. 자신의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부동산과 교육 투기 경쟁에 뛰어들었고 그 결과 높아진 자산 가격은 패배자의 아이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불행하게도 이 “상대적 지위 경쟁”은 대부분을 패배자로 만든다. 자산 가격이 소득보다 더 빨리 오른다면 그건 곧 절망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은 40대가 되면서 과거의 이타성을 청춘기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하면서 “잔치는 끝났다”고 선언했다.

 

한 시민이 부동산 중개업소에 내걸린 시세표를 살펴보고 있다. (출처 :경향DB)

자산 가격 역시 한 없이 오를 수는 없다. 머지 않아 닥쳐올 가격의 파괴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불러 일으킬 것이다. 어떤 정책을 만드느냐에 따라 서서히 가격이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산 가격이 지나치게 높다는 생각이 있을 리 없는(놀랍게도 그들은 아직도 ‘거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들이 이명박정부처럼 가격을 끌어올릴 궁리만 한다면, 어느 순간 가격은 폭락하고 말 것이다.

 

인구가 많은 50대가 본격적으로 자신들을 위한 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정체할 수 밖에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론 위에서 언급한 자산가격의 문제다. 하지만 세대간 정의를 해칠 정책은 얼마든지 있다. 예컨대 이번 대선에서도 논의된 노인연금도 그런 종류에 속한다. 연금, 또는 연령 수당이란 한 해에 생산된 부를 세대 간에 어떻게 나눌 것인가의 문제다. 노인연금의 증가는 기존 스톡(자산)의 소유에 더해서 플로우(소득)마저 노령 세대에 유리하게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노인들이 대부분의 자산을 틀어쥔 채 근검절약까지 한다면 일자리는 더욱 줄어들고 세대간 빈부 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다. 지난 20년간 일본이 제로성장을 하면서도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는 데는 이러한 세대간 착취, 세대간 부정의가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다.

 

어떤 세대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집단 간 경쟁은 집단 내 협동을 강화하고 다수결로 대결하는 한 구성원이 많은 세대가 이길 수 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이 70년대부터 성장률이 떨어졌고 일본이 80년대 후반부터 “안정 속의 정체”를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한국만 예외가 될 수 있을까? 오로지 이제 초로에 접어든 50대들의 각성에 달려 있다. 내 자손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자손을 위해서, 나아가서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생태를 위해서 “혁명적인 정치”를 할 때 비로소 운명을 바꿀 수 있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자연으로 말하자면 나이가 많아질수록 필요한 자산과 돈은 줄어든다. 자산과 소득을 아낌없이 분배하고 아직 남아 있는 능력이 있다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아무런 재산도 능력도 남기지 않고 무소유로 죽을 수 있다면 그건 진정한 생의 혁명일 것이다. 언젠가 끄적거린 것처럼 “노인혁명당”이 필요하다. 개인의 각성이 어렵다면 제도적으로 그렇게 만들면 된다. 북유럽의 소득재분배를 넘어서 자산재분배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 집 3형제는 57년, 60년, 63년생으로 모두 베이비붐 세대이다. 짐작컨대 하나와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을 찍었을 것이다. 내가 변할 것 같지는 않지만, 내 동생도 5년 후엔 변하게 될까?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절망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나와 내 동생을 설득할 수 있을까? 5년간 얼마나 그럴 수 있을까? 5년 뒤의 승패를 가를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이다.

 


Posted by mojiry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7)
 



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인간 협력의 조건 3 : 평판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간접 상호성(Indirect Reciprocity)이다. A가 B를 도와주고, B가 C를 도와주면 D가 A를 도와준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평판(reputation) 때문이다. 상대를 도와주면 나의 평판이 좋아져서 훗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상대를 배신하면 이기적 인간이라는 평판을 받게 되어 훗날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실제 이론과 실증 연구에 의하면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는 사람이 더 많은 도움을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앞서 살펴본 직접 상호성은 협력을 설명하는 매우 강력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제한적이다. 우선 똑같은 두 사람이 반복적으로 만나야 하며, 서로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 얻게 되는 혜택이 커야 한다. 하지만 때로 사람들은 낯선 이를 돕기도 하고, 나를 도와주지 않았던 사람을 돕기도 한다. 사람들 사이의 협력은 반드시 쌍방 대칭적으로 일어나지만은 않는다. 이를 설명해주는 것이 간접 상호성이다. 직접 상호성에 의한 협력이 물물교환이라면, 간접 상호성은 돈이 발명된 후의 교환과 같다. 평판이 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에 대한 평판이 얼마나 잘,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되느냐가 중요하다. 평판은 결국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달된다. 소위 말하는 뒷담화가 정확하고 신속하게 퍼지는 사회일수록 협력이 잘 일어나는 셈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q는 다른 사람의 평판을 알 수 있는 확률이고, c는 협력할 때 지불하는 비용이고, b는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이익이라 한다면 q > b/c 인 경우에 이타적 행동이 나타나다. 이익 대비 비용의 비율보다 평판이 확산되는 확률이 클 경우, 즉 잘 확산될 경우에 이타적 행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DB)





인간 협력의 조건 4 :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
 
 
네 번째는 네트워크 상호성(Network Reciprocity)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협력하는 사람과 배반하는 사람이 골고루 섞여 있고, 모든 사람과 가리지 않고 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를 가정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경우가 많다. 공간적 요인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적 관계가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라도와 경상도의 분리, 그리고 정치적 지지 정당의 선명한 차이가 그렇다. 내가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같은 동네에 살거나 같은 종교를 믿거나 같은 학교를 다녔거나 혹은 같은 정치적 견해를 보유한 사람들일 것이다. 무엇이든 나와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이다.
 
협력과 배반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협력하는 사람들은 협력하는 사람과 어울리고 배반하는 사람들은 배반하는 사람들끼리 어울린다. 협력하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협력의 이익을 얻게 된다. 하지만 배반하는 사람 주변에 있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배반으로 인해 최악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때문에 협력하는 사람 주변으로는 사람이 모이지만, 배반하는 사람 주변에서는 사람이 멀어진다. 유유상종이다.
 
만약 협력하는 사람과 배반하는 사람이 아주 골고루 섞여 있는 상황에서, 그 둘이 만난다면 협력하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 이것이 반복되면 협력하는 사람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의하면 도태되거나 사라진다. 하지만 협력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서로 이득을 주게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배반하는 사람들을 이길 수 있다. 이것이 네트워크 상호성이다. 국지적 상호성이라고도 한다.
 
이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k를 내가 관계를 맺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수라고 하고, c는 협력할 때 지불하는 비용이고, b는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이익이라 한다면 b/c > k 인 경우에 이타적 행동이 나타난다. 이익 대비 비용의 비율이 주변사람의 수보다 클 경우, 즉 내가 만나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협력은 잘 일어난다. 주변사람의 수가 늘어날수록 다양한 사람을 만날 확률이 커지므로 유유상종의 기회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인간 협력의 조건 5 : 착한 애들이 뭉치면 세다
 
 
다섯 번째는 집단선택(Group Selection)이다. 집단선택이란 어떤 집단이 어떤 특성을 갖는가 혹은 어떤 특성을 가진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 집단들의 생존 가능성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그 속성이 전체로 퍼져나가게 될 지 아니면 없어지게 될지가 결정되는 과정을 뜻한다. 지금까지는 개인을 중심으로 협력과 배반의 선택을 살펴보았는데, 이제 개인이 모여서 이루어진 집단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협력자끼리 모여 있는 협력자 집단과 배반자끼리 모여 있는 배반자 집단이 있다. 협력자들은 서로를 돕지만, 배반자들은 돕지 않는다. 협력과 배반을 통해서 얻게 되는 이득만큼 자손을 남길 수 있으며, 자손들은 부모의 집단과 같은 집단에 속한다고 가정해보자.
 
앞서 게임이론으로 살펴본 사회적 딜레마 상황에서 보았듯이, 서로 협력할 때가 서로 배반할 때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 따라서 협력자 집단이 배반자 집단보다 더 많은 이득을 거두게 되고,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 반면 자손 수 증가에서 뒤처지는 배반자 집단은 소멸하게 된다. 만약 협력자와 배반자가 섞여 있는 혼합집단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협력자와 배반자가 섞여 있는 경우 배반자가 더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러므로 그 집단은 배반자 집단으로 변하게 되고, 협력자 집단에 의해 밀려난다.
 
이 경우 두 가지 차원에서 선택이 일어난다. 집단 내에 있는 개인의 차원에서는 배반자가 유리하지만, 집단 간 차원에서 보자면 협력자 집단이 유리하다. 때문에 집단 내에서는 협력자의 수가 점점 줄어든다 해도, 협력자 집단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전체적으로는 협력자가 더 많아질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집단선택을 다층선택(Multilevel Select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쉽게 말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이타적인 사람이 많이 있는 집단, 집단 내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집단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국가 스파르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에서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희생전신이 강한 투사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n을 한 집단의 최대 크기, 다시 말해 한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 수라고 하고 m을 집단의 수라고 한다. c는 협력할 때 지불하는 비용이고, b는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이익이라 한다면 b/c > 1+(n/m) 이다. 따라서 한 집단 내의 사람 수가 적을수록, 그리고 집단의 수가 많을수록 협력이 잘 일어난다. 한 집단 내의 사람 수가 적다는 것은 유유상종이 일어날 확률이 높다는 뜻으로 협력자끼리 모여 있을 경우가 많아진다는 뜻이다. 협력자와 배반자가 섞여 있을 경우 협력자가 불리하기 때문에 협력자끼리 모여 있을수록 협력자의 수가 증가할 수 있다. 반대로 집단의 수가 많다는 것은 협력자 집단이 배반자 집단을 이기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집단의 차원에서는 협력자 집단이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혈연선택, 직접 상호성, 간접 상호성, 네트워크 상호성, 집단선택이라는 인간 협력의 조건 다섯 가지를 살펴보았다. 를 정리해보자면 혈연관계가 가까울수록, 어떤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이 높을수록, 사람들의 평판이 잘 알려질수록, 만나는 주변 사람이 적을수록, 집단의 구성원이 적고 집단의 수가 많을수록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이런 조건을 활용하고 반영하여 협력을 유도할 수 있는 사회 규범, 법률, 제도를 만들 수 있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8)편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mojiry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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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새사연의 정태인 원장이 2011년 12월부터 2012년 2월까지 진행한 ‘정태인의 경제학 과외 2부 : 사회경제, 공공경제, 생태경제’ 강연 내용을 수정 보완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착하게 살면 다 해결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사회적 딜레마 게임을 해결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모든 사람이 이타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보수를 고려했던 것과 달리 남의 보수만을 고려하여 게임이론을 전개하면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하면서 죄수의 딜레마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자. B가 협력을 선택할 때 A도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3을 얻는다. 반면 A가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1을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이번에 B가 배반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A가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4를 얻고, A도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2를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즉, A는 B가 무엇을 택하든지 협력을 택해서 상대방의 보수를 최대화할 것이다. B의 경우도 A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협력을 택하게 된다. 따라서 A와 B 모두 협력을 택하고 (3,3)이 새로운 내쉬균형이 된다. 이는 두 사람의 보수의 합이 가장 크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점이다.
 
사슴사냥게임의 경우도 똑같이 적용해보자. B가 협력을 선택할 때 A도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4를 얻는다. 반면 A가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1을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이번에 B가 배반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A가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3을 얻고, A도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2를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즉, A는 B가 무엇을 택하든지 협력을 택해서 상대방의 보수를 최대화할 것이다. B의 경우도 A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협력을 택하게 된다. 따라서 A와 B 모두 협력을 택하고 (4,4)가 새로운 내쉬균형이 된다. 이 역시 두 사람의 보수의 합이 가장 크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
 
치킨게임은 어떨까? B가 협력을 선택할 때 A도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3을 얻는다. 반면 A가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2를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이번에 B가 배반을 선택하는 경우이다. A가 협력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4를 얻고, A도 배반을 선택하면 상대방인 B는 1을 얻는다. 상대방의 보수를 고려한다고 가정했으므로 A는 협력을 선택한다. 즉, A는 B가 무엇을 택하든지 협력을 택해서 상대방의 보수를 최대화할 것이다. B의 경우도 A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협력을 택하게 된다. 따라서 A와 B 모두 협력을 택하고 (3,3)이 새로운 내쉬균형이 된다. 역시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점이다.
 
이처럼 모두가 남을 생각한다면 문제는 해결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종교의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종교적 해법은 굉장히 강력해서 모든 사회적 딜레마 게임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류 역사에서 종교적 해법이 장기적 성공을 거둔 경우는 없다. 왜일까?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기적이기만 한 존재는 아니지만 이기적 속성을 갖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 인간 안에 이타적인 모습도 존재하고 이기적인 모습도 존재한다.


인간은 언제 협력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해법을 찾아야 할까? 대부분의 인간은 상대가 이기적일 때 자신도 이기적으로 행동한다. 손해를 보거나 바보가 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상대가 이타적이라고 확신한다면, 상대가 나에게 잘해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자신도 이타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또 서로 이타적으로 행동했을 때, 서로 협력했을 때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득이 크다면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변화를 유도할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규범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경향신문DB)

 
 
인간뿐 아니라 자연 속 동물들도 서로 협력할 때가 있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Charles Robert Darwin)은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ional Seleciton)>에서 적자생존을 주장하지만 자연 곳곳에서 나타나는 동물의 이타적 행위 또한 설명하고자 했다. 그 중 대표적 사례로 꿀벌를 들었다. 꿀벌 사회는 한 마리의 여왕벌과 나머지 수 천 마리의 일벌로 이루어진다. 대다수 일벌은 여왕벌이 낳은 알을 돌보고,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일벌의 일생은 이타적 행위 그 자체이다.
 
비슷한 예로 남아프리카 지역에 사는 미어캣이라는 몽구스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 있다. 이들은 땅굴에서 집단서식을 하는데 서로 돌아가면서 보초를 선다. 침입자가 나타날 경우 보초는 위험을 알리기 위해 큰 소리로 신호를 보낸다. 이 덕분에 나머지 미어캣은 위험에 대비하고 안전하게 피신할 수 있지만, 큰 소리를 내면서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킨 보초는 침입자의 눈에 띨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다. 흡혈박쥐들도 이타적 행동을 한다. 이들은 가축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데 흡혈에 성공하지 못하는 날이 많다. 만약 충분한 피를 섭취하지 못해서 굶어죽을 상태에 이른 흡혈박쥐가 있을 경우 다른 흡혈박쥐가 자신이 빨아온 피를 나누어준다. 자신이 먹어야 할 몫을 포기하고 남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동물은 왜 이타적 행동을 할까? 사람은 왜 그럴까? 무임승차를 하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을까? 하버드대학교의 생물학 및 수학과 교수인 노박(Martin Nowak)은 2006년 <협동 진화의 다섯 가지 규칙(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여섯 페이지에 불과한 이 짧은 논문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이 협력하는 다섯 가지 경우를 보여준다.


인간 협력의 조건 1 : 피는 물보다 진하다
 
 
첫 번째는 혈연선택(Kin Selection)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로도 표현된다. 혈연, 핏줄은 더 구체화되어 유전자로 설명된다. "나는 물에 빠진 2명의 동생 또는 8명의 조카를 살릴 의지가 있다"고 말한 생물학자 할데인(J. B. S. Haldane)의 장난스러운 설명 또한 이를 설명한다. 동생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공유하고 있고, 조카는 8분의 1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죽더라도 2명의 동생 또는 8명의 조카를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는데 차이가 없다는 주장이다. 생물의 가장 큰 목표인 종족보전을 위해서는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하며, 이를 위해 자신과 혈연관계가 있는 개체들을 돕고자 하는 이타적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꿀벌도 미어캣도, 흡혈박쥐의 이타적 행동도 결국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이기적인' 이타적 행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를 영국의 생물학자 해밀턴(Hamilton)이 1960년대 확장하여 체계화 것이 해밀턴 법칙(Hamilton's Rule)이다. 다른 개체와 자신과의 연관성(relatedness)을 r이라 하고, 다른 개체를 돕는데 지불하는 비용(cost)을 c, 이를 통해 얻게 되는 이익(benefit)을 b라 했을 때 r > c/b 인 경우에 이타적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c/b는 이익 대비 비용의 비율을 나타낸 것으로 이 숫자가 클수록 협력의 비용이 크며, 이 숫자가 작아질수록 협력의 이익이 크다. 이 비율보다 연관성이 클 때, 다시 말해 혈연관계가 긴밀할수록 이타적 행동이 잘 일어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설명은 적용 범위가 너무나 제한적이다. 내 가족, 친척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내 친구들은 아무리 친하고, 서로를 배려한다고 해도 혈연관계나 유전자의 공유도로 따지자면 그 정도가 매우 미약하다. 혈연선택은 이를 설명하기 힘들다. 남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베풀어지는 선행의 경우에도 설명할 수 없다. 앞서 말한 동물들의 경우도 그렇다. 케임브리지대학교의 팀 클러튼 브록(Tim Clutton Brock)이 미어캣 집단을 관찰한 결과, 그들 속에는 혈연관계를 맺지 않은 이민자들도 섞여 있었지만 보초를 서는 횟수에 있어서 차별이 없었다. 이들의 이타적 행동이 반드시 유전자의 공유도 때문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인간 협력의 조건 2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두 번째는 직접 상호성(Direct Reciprocity)이다. A가 B를 도와주면 그 보답으로 B가 A를 도와준다는 것이다. 특히 둘 사이의 관계나 거래가 장기적이거나 반복될 때 직접 상호성이 많이 나타난다. 단골이 형성되는 경우가 이렇다. 가게가 좋은 물건을 팔면, 손님들은 이에 호응해서 그 가게만을 찾아오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반복적인 관계가 형성되면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오늘 하루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해서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기보다 앞으로의 장기 거래를 생각해서 더 친절히 대하게 된다.
 
즉, 직접상호성에서는 반복의 횟수가 중요한데 이를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w는 게임이 반복될 확률이고, c는 협력할 때 지불하는 비용이고, b는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이익이라 한다면 w > c/b 인 경우에 이타적 행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익 대비 비용의 비율보다 게임이 반복될 확률이 클 경우, 즉 반복되는 횟수가 클수록 이타적 행동이 잘 일어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죄수의 딜레마도 이를 반복할 경우 다른 해법이 나올 수 있다. 원래 죄수의 딜레마에서는 상대방이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이 나는 배반하는 것이 (2,2)로 이득이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이런 거래를 할 경우 1회의 보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게임 속에서 발생하는 보수의 합을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3,3)을 선택할 때 장기적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얻게 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실제로 1980년대에 미국의 정치학자 악셀로드(Robert Axelrod)는 죄수의 게임을 반복할 경우 최선의 전략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전 세계의 경제학자, 게임이론가, 컴퓨터과학자 등을 대상으로 토너먼트를 벌였다. 1등은 미국의 수학심리학자 아나톨 래퍼포트(Anatol Rapoport)가 제시한 TFT(Tit for Tat)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한마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 설명할 수 있다.
 
우선 처음에는 상대방에게 잘해준다. 그 후에는 상대방이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상대방이 잘못하면 나도 잘못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직전에 한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다. 이 간단한 전략이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다. 이 경우 일단 서로가 협력하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협력할 수 있다. 즉, 계속해서 (3,3)의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방이 순간의 실수로 배반할 경우, 나도 배반하게 되어 계속해서 서로 배반하게 된다. 즉, 계속해서 (2,2)의 보수밖에 얻지 못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추가 전략이 몇 가지 필요하다. 서로 배반하는 선택이 어느 정도 계속될 경우 먼저 협력하여 변화의 기회를 꾀하는 것이다. 이를 GTFT(Generous TFT), 즉 관대한 TFT라 한다. 혹은 상대방이 두 번 연속해서 배반할 경우에만 똑같이 배반하는 전략이다. 상대방이 단 한 번 배반하고 다시 협력으로 돌아설 때에는 응징하지 않지만 두 번 이상 배반할 경우에는 응징하는 것이다. 이는 TF2T(Tif for 2 Tat)라 부른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잘 지내려면 처음에는 협력해라, 그리고는 상대방이 하는 대로 하라, 그런데 만약 배반이 계속되면 네가 먼저 협력하라. 이렇게 하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기적 인간과 대립하여 상정했던 상호적 인간의 특성에 딱 맞는 이야기이다. 2500년 전 성경과 논어에서 이미 알려주었던 황금률과도 같다.
 
하지만 경제학자들 중에는 직접상호성은 이타적 행위가 아니라 이기적 행위라고 규졍하기도 한다. 결국 장기적으로 자신이 얻는 보수가 높은 쪽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이기적 동기에 의한 행동이라는 것이다. 또한 혈연선택과 마찬가지로 직접상호성도 제한적이다. 수많은 인류 중 내가 두 번 이상 만나는 사람, 나와 두 번 이상 거래를 하는 사람은 매우 소수이기 때문이다.
 
 
* 정리 : 이수연(새사연 연구원)
* 정태인의 '네박자로 가는 사회적 경제' (7)편으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mojiry


한겨레 어딘가(이코노미 인사이트 같은데...)의 부탁으로 자기 서평을 썼습니다. 그런데 어디로 부쳐야할지 몰라 기억 속의 기자에게 보냈더니 거기가 아니랍니다. 그 후에도 독촉이 없어서 그냥 허공에 떠버린 글입니다. 이번에 나온 책, "착한 것이 살아남는 경제의 숨겨진 법칙"(제가 정한 제목이 아니라 길고 어렵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생아 같다”

 


책이 도착했다. 연구원들의 축하말에 섞여든 내 혼잣말이다. 

작년 여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연구원으로 출판사(상상너머)에서 찾아왔다. 분량이 꽤 되는 교정지를 들고서. 아뿔싸, 프레시안 사회교양원에서 한 강연을 책 한권 분량의 원고로 만들었단다.

프레시안의 강연을 책으로 만들어도 되느냐는 질문에 선뜻 응한 건 그 이전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강연이 한 데 묶인 “80이 20에 지배당하는 사회”(철수와 영희)라든가 “자존심”(한겨레출판사), “거꾸로 희망이다”(시사인) 등이 그런 책이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분들 사이에 한 꼭지 들어가는 건 자체로 영광이기도 하고, 동시에 출판사나 독자에 대한 내 책임은 바닷가 모래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두 번에 걸친 네 시간의 강연 가지고 책 한권이 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어쩌랴. 승낙을 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즉흥이 반 이상이었던 강연을 정리한 출판사의 노고를 어떻게 한마디로 물거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강연록의 한 꼭지, 공저의 논문 하나로 내 이름이 책에 나온 적은 꽤 있지만 표지에 홀로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경제학자 스라파가 100쪽 밖에 안되는 책 딱 한권(“상품에 의한 상품 생산”)만 남겼다는 신화는 20대 얼뜨기 경제학도에게 매혹 그 자체였다

그런 생각을 마음 깊은 곳에 가지고 있으니 남의 논문이나 책에 얼마나 가혹했겠는가? 서정주 식으로 말하자면 8할이 질투였을 그런 객기 탓에 난 마감이 없는 글은 단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박사 학위마저 그랬으니(석사학위도 7년만에 지도교수의 강권 덕에 냈다) 내 이름으로 된 단행본이 나올 리 없다.

선인세를 3년 전에 받고도 아직 시작도 못한 “딸과 함께 쓴 경제학”도 마찬가지다(출판사 “레디앙”에 정말, 정말 미안하다). 해서 “사생아 같다”는 말이 흘러 나왔을게다.

“세박자 경제론”

2007년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 때 심상정 의원은 “세박자 경제론”이라는 걸 내 놓았다.

현실의 경제는 시장경제, 공공경제(public economy), 사회경제(social economy, 당시에는 풀뿌리 경제라고 불렀다)의 세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시장경제는 경쟁(또는 등가교환)을 통해 효율성을 주 목표로 하고 공공경제는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달성해야 하고 사회경제는 인간의 상호성(reciprocity)을 바탕으로 연대(solidarity)를 이뤄내야 한다. 

각각 시장-국가-시민사회라는 3분론에 들어 맞고 프랑스대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에 해당되니 꽤 그럴 듯 보이지 않는가? 

또 당시에는 명확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폴라니의 세가지 인간의 교류양식(교환, 재분배, 선물)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것이었다.

당시나 지금이나 사회경제라는 개념은 한국에 거의 소개되지도 않았고, 90년대 이래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논의가 됐지만 엄밀한 이론적 정의에 합의했다고 보기도 어렵다. 

결국 스스로 그 이론적 근거를 찾아야 했는데 1년여 고투한 결과가 ‘사회경제론’(“리얼진보”, 2010)이었다. 엉성하기 그지 없지만 아마도 세계 최초로(^^) 사회경제의 근거를 “신뢰와 협력”이라는 인간 본성에서 찾은 글일 것이다. 

사회경제라는 역사적 실체의 이론적 근거, 80년대 이래의 대규모실업과 복지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실천적으로 사용되어 온 그 개념의 근거를 진화생물학/심리학, 행동경제학/실험경제학의 최근 논의에서 찾으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 수준이었고, 최정규교수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이 계기가 되었다.

이후 경제학, 사회학, 정치학, 심리학에서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닥치는대로 논문을 읽었지만한달에도 수백, 수천건 논문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논의를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선 “신뢰와 협동”이 불가결한 것도 또한 엄연한 사실이고 때마침 우리나라에서도 생협과 사회적 기업, 그리고 공동체운동이 활성화되었다. 

또 지난 지자체 선거에서 복지가 핵심 이슈로 등장하면서 사회서비스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내 단 하나의 글을 본 관련 단체들이 강연을 요청했고 이제 이 주제로 강연을 한 것만도 수백회에 이를 것이다.

사회적 딜레마와 협동

인간의 본성이라니, 자기 내면만 들여다 보면 되니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주제지만 동서고금에 걸쳐 온갖 이론이 다 등장할 정도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주제다. 

예컨대 “인간은 이기적인가?”라는 질문은 결코 쉽게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행히 게임이론, 특히 사회딜레마 게임(social dilemma game, 죄수의 딜레마, 사슴사냥게임, 치킨게임 세 개가 있다)은 직관적으로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 무엇보다도 짧은 강연에서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집중하는 데 그만이었다.

사회딜레마란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 바꿔 말해서 인간이 이기적이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말한다.

이는 인간이 자기 이익만 추구할 때 사회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아담스미스의 직관, “보이지 않는 손”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지난 30년간 세계를 지배한 만능의 시장도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사회딜레마이다. 현재의 세계금융위기, 그리고 곧 닥쳐올 생태위기도 물론 이 딜레마에 해당한다.

 
이 분야의 연구는 일천하지만 어쨌든 답은 협동(cooperation)으로 결론 났고 어떤 조건에서 협동이 가능한가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핵심 과제이다. 

노박(Nowak)의 수학에 의한 논리적 결론이든, 아니면 전 세계 공유지의 역사를 천착한 오스트롬의 결론이든 마찬가지다. 

한참 공부하고 나서야 인류가 여태 멸망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한 비결은 협동이었고 그것은 또한 선현들의 지혜에 다름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답은 뻔하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딜레마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이다. 경제침체에서 쉽게 빠져 나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나라들이 제 시간 안에 기후 변화문제의 해법에 동의할 것 같지도 않다. 

해서 “위기의 해법으로서의 협동”은 적어도 10-20년간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다. 

이 책에 장점이 있다면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 밖에 없을 것이다. 

 
내 혼잣말을 들은 한 연구원이 위로(?)를 했다. 

 
“그런 애가 효도하는 법이에요”. 

정말 그렇게 돼서 출판사에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Posted by mojiry

* 이 글은 이번 달, 그리고 내달 작은책에 실릴 글입니다.

***


 우리는 왜 “‘깨어있는 시민”이 못 될까 - 고 노무현대통령께 드리는 글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우리들의 행동방식과 “88만원 세대”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행동경제학이다. 이 생각의 흐름 밑바닥에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개인이 어떻게 행동할까)가 있다. 그리고 난 맑스주의, 즉 구조주의와 역사주의로 훈련된 사람이다.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방법론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박현채선생의 말씀, “진보란 민중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이 불편한 공존에 대한 내 나름의 변명이다. 결국 실용인 셈인데, 멋진 이론의 틀을 만드는 게 아니라(어찌 사적 유물론이나 일반균형론과 같은 아름다운 그림을 또 다시 만들 수 있으랴) ‘민중의 정책’을 만드는 게 내가 살 이유라면 그리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도 아니다. 어중이 떠중이로 시작했다가 바로 여기서 실패(^^)한 프로젝트, “사랑의 경제학”(협력하는 경제, 따뜻한 경제는 가능한가?)도 실은 그런 욕심의 결과였다. 이제 구조와 개인을 어설프게나마 만나게 할 때가 되었다.

 

우리 현실에서 가장 분명하면서도 해명하기 힘든 현상이 이른바 “88만원 세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현상의 뿌리에는 “세대간 착취”가 도사리고 있다. 내 자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다음 세대 대부분을 착취하는 걸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기성 세대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결국 우리 아이들 세대 전체를 착취하고 있는 거라면 그 얼마나 끔찍한가? 불행하게도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웬만해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 있다. 혹시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때, 자문해봐야 할 질문은 이렇다. “남이 다 하면 나도 따라 할 수 밖에 없다”(공포), 그리고 “남이 다 안 하는 경우 나만 하면 ‘대박’이다”(탐욕).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를테면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바로 사교육이 그렇다. 그리고 부동산(주식)에 대한 우리 태도도 비슷하다. 남들이 다 과외시키는데 우리 애만 마냥 놔둘 수 없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사는데 나만 유유자적, 안빈낙도 하다간 영원히 셋방살이 신세일 거 같고, 반대로 남들이 다 안 한다면 어디 값싸고 좋은 과외선생이나 잘 나갈 땅이 없나, 기웃거리는 우리는 바로 그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모름지기 투기란 죄수의 딜레마가 위력을 발휘하는 게임이다.

 

그런 투기의 결과로 사교육과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아주 희귀한 예외를 빼곤 백이면 백 부자들이 이긴다. 때론 지배계급이 처음부터 그런 게임을 설계할 수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대표였던 졸릭(Zollick, 지금은 세계은행 부총재)의 “경쟁적 자유화”는 바로 이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것이었고 김현종은 부처님 손바닥안의 손오공처럼 한미 FTA를 추진했다(“남들이 안 하면 미국 시장을 선점”해야 하고 “남들 다하는 데 우리만 FTA 후진국일 수 없다”는 정부의 논리를 상기해 보라).

 

집값과 땅값이 하늘로 치솟고 과외비에 허리가 휜다. 보릿고개가 사라진지 이미 오랜데, 우리 아이들이 더 절망적인 건 실제론 대부분 이길 가망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아이만은 그런 함정을 신묘하게 비켜 나갈 것이고 그러면 ‘대박’이라는 황당무계한 낙관이, 아무리 밤을 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고 ‘신의 직장’에만 목을 매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건 분명히 “세대간 착취”다.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누려야 할 자연을 파괴하는 “4대강 사업”만 미래를 착취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명박대통령만 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근시안적 경쟁이 끝없이 끌어 올리고 있는 집값을 아이들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단 1점에 목을 매게 하는 입시의 가격은 또 어떤가.

 

우리 모두 스스로 매일 한 삽씩 절망의 늪을 파면서 내 아이만은 늪 밖에서 승리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이 결국 우리 아이들을 착취하고 있다. 진단이 이렇다면 답도 간단하다. 게임이론으로 말하자면 ‘죄수의 딜레마’를 ‘사슴사냥게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고 현실로 말하자면 지금의 무한경쟁에서 다 같이 빠져 나오자고 합의하면 된다. ‘사교육 금지’, ‘부동산 투기 금지’에 마음을 모을 때만 비로소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 홀로 그럴 수 없다는 이유로 지는 게임을 계속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말 그대로 “88만원 세대”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투기의 미몽에서 얼마간 벗어난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우리 스스로 비춘 한줄기 빛이다. 물론 빛이 보였다고 해서 출구가 열리는 건 아니다.

 

거시정책과 투기

 

같은 사안을 놓고 보수는 개인을 탓하고 진보는 사회적 구조를 들이댄다. 이 기준에 비춰 본다면 위에서 나는 지금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한 것이다. 개인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게임이론의 틀로 설명하면 스스로 갑갑해진다. 우리 모두 각성하면(“깨어 있는 시민”만 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사실도 현실에서 실천하기론 지난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고 게임의 구조가 그런 사회를 직접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20여년 전 처음 게임이론을 만났을 때 나는 후배에게 “역사는 게임이 아니”라고 자못 단호하게 진단했다).

 

진보건 보수건 재벌들의 수출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출이 늘어야 성장률이 높아지고 그래야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보수주의의 가설을 누구나 얼마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집단 사고(경로의존적 사고, 또는 현상유지 편향)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우리의 거시지표가 그 결과이다. 미국이 작년에 6천억 달러 규모의 제2차 양적 완화(통화증발)을 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를 향해서 노골적으로 통화절상 압력을 가해도 원화는 꿋꿋하게 고환율을 유지했다. 거의 모든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올라간 가운데 대달러 원화 가치는 2007년말 대비 여전히 20% 정도(실질로는 17% 가량) 낮아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갈 곳 없는 세계의 돈이 아시아의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으로 몰려 들었는데도 환율이 그 상태를 유지했다는 건 한국은행이 달러당 1100원 선에서 무제한으로 달러를 사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그 액수만큼 시중에 원화가 풀린다. 물가안정이 지상의 목표인 한은은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서 그 돈을 거의 다 거둬들였다(이른바 불태화 정책인데 1997년 외환위기의 교훈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상대적으로 값싸진 우리 물건은 수출이 잘 될 것이다. 도요타의 리콜사태부터 최근의 지진까지 일본의 불행 역시 여기에 일조를 했다.

 

한편 국채(통안증권)를 사들인 은행들은 자산이 증가했으므로 대출을 늘릴 여력이 생겼다. 그러나 떼어먹힐 걱정이 거의 없는 안전한 대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흘러넘친다. 우리 기업의 90% 이상의 숫자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투자할 여력도 없고, 투자해봤자 하청단가 인하로 생산성 향상분을 고스란히 빼앗긴다. 그 결과가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에 뜨는 ‘값싼 대출’ 메시지이다. 넘쳐나는 돈을 가계에 빌려 줘야 은행이 살 수(평균 수익률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로 더 없이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는 지금도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물가안정- 한국은행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라고 내건 한은이 물가가 4%를 넘나드는 데도 금리를 사실상 동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외적으로 금리를 올리면 환율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도 있을 테지만 국내에 부동산 거품이라는 시한폭탄이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거시정책은 이명박 정부만 추구한 것이 아니다. 2000년대는 세계적 부동산 붐이 있었고 우리 사회에선 더욱 더 그랬다.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서 위에서 말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사회의 위쪽으로 돈이 몰리게 하는 환율과 금리 정책이 낳은 통화 홍수를 부동산과 주식 투기가 흡수하는 구조였다. 대세에 뒤처지면 안된다는 공포와 나만은 대박을 칠 거라는 탐욕이 우리 스스로 그런 구조를 용인하고, 나아가서 부추겼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한국 부자들의 “땅짚고 헤엄치기”도 위협했다. 거품이 낄대로 낀 부동산 시장이 돈을 흡수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대세 하락기”란 이런 심리를 표현한다. 투기의 정신적 고향인 월스트리트가 초토화하는 걸 보면서도 투기에 목을 맬 만큼 우리의 심장이 튼튼하지는 않다. 하여 보수주의적 주류경제학의 공적 1호인 인플레이션이 현실이 되고 있는데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래서 간단하다. 부동산 거품의 파국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막아야 한다. 공급 쪽에서 파산의 위기에 빠진 건설회사에 일단 대출을 연장해주고(이른바 “대주단 협약”) 나아가서 일감을 마련해 줘야 하니 4대강 사업이 절실하다. 한편 팔리지 않을 건설투자에 돈을 댄 금융회사도 망하면 안된다. 부실화한 저축은행의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시켜야 하니 온갖 편법이 다 등장하고 있다(은행들의 ‘자발적’ 민간 구제금융). 나아가서 지난 정부가 채워 놓은 부동산 투기 억제 온갖 차꼬도 다 풀어야 한다. “내가 해 봐서 다 아는” 대통령의 경험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 이유이다.

 

사회구조와 우리들의 행동

 

이명박정부 경제정책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대기업 수출의 증가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그래야 우리의 삶이 낳아질 거라는 주장은 이미 15년 전 경부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상류의 저수지가 가득 채워지면 그 물이 아래로 흘러넘쳐 우리 모두 행복해질 거라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없어진지 오래다. 투기라는 메커니즘은, 4대강 사업이 스스로 내세운 것처럼 상류의 “물통을 더 빨리 키운다”. “부자 되세요”라는 낙관적 구호가 웅변한, 그리고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경쟁이 어우러진 투기경제(조금 우아하게 말한다면 “자산주도경제”)는 위에서 보았듯 그들의 물통을 늘리는 데 우리가 적극온 몸으로 일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혹시 돈이 넘쳐나서 문제가 된다면 외부로 빼돌리면 그만이다. 이미 글로벌 기업이 된 재벌들은, 하청 중소기업이 다 망한다 하더라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부품을 조달하면 되고 투기경제 속에서 개인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 대기업 노동자들 역시 한 배를 탔다. 노동계급의 연대란 상투화한지 이미 오래 된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일 뿐이다.

 

구조는 행위 패턴을 낳고 생존을 위해 매달린 그 행위가 다시 구조를 강화시킨다. 세계금융위기는 그 구조가 위기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 구조는 지난 30여년간 세계 전체에 새겨진 것이다. 케인스의 “소득재분배”(실제 케인스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지만)를 넘어서 “자산재분배”의 거시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는 세계, 또는 지역적 위기의 재발에 대비해야 한다.

 

부동산이나 교육과 같은 자산의 가격이 서서히 떨어지도록 만들고 개별 경쟁으로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자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 경제학이 새삼스럽게 지난 50년간 호들갑을 떤 ‘공유지의 비극’을 인류는 항상 극복해 왔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현재의 위기가 ‘보이지 않는 손’이 아예 없거나, 혹시 있더라도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스티글리츠)이라면 해답도 간단하다. 인류 역사 상 우리가 절멸하지 않고 살아남게 했던 그 비결을 되살리면 된다. 경쟁이 아닌 협력이 그 답이다. 전 인류가 모두 걸려 든 “기후변화”와 같은 사회적 딜레마의 해결 방식도 똑같다. 물론 딜레마라는 말이 그대로 표현하듯 그 실천은 지극히 어렵지만 말이다.

 

너무 급작스레 현실로 돌아온 질문이지만, 앞으로 1년 6개월여 우리를 사로잡을 정치일정은 우리를 이런 해답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박근혜씨야 그렇다치고 과연 현재의 야당연합은 이런 구조와 행위를 넘어서 희망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까? 지금까지 말한 위기의 구조를 초헌법으로 만드는 “거대경제권과의 FTA"에 찬성하면서 복지(재분배)로 희망을 만들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자기의 순수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어서 오히려 현실 정치를 외면하고 있는 ‘리얼 진보’가 그 희망일까? 협력의 원리를 손에 잡히는 정책으로 구현하는 것이 보수와 진보를 넘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려면 눈부터 떠야 한다. 위기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임금의 나체를 맨 눈으로 보고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해야 한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선 행동을 해야하고 모두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선 구조를 조금씩이라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Posted by mojiry

* 이 글은 작은책에 실렸습니다.  글에 등장하는 노박교수의 논문을 첨부합니다.




인간 협력의 조건

정태인(경제평론가)

1. 5개의 규칙


(경향신문 자료사진)



인간은 언제 협력할까요? 하버드대의 생물학 및 수학과 교수인 노박(Nowak, '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 "Science", 2007, V314)은 협력이 진화할 수 있는 5가지 규칙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어머니의 가이 없는 사랑’에서 찾았던 “혈연 선택”입니다. 꿀벌이나 흰개미, 그리고 인간 세상에서 광범하게 관찰할 수 있는 협력, 그것도 자신을 희생하는 협력의 많은 부분은 핏줄 때문이라는 거죠. 전설적인 생물학자 할데인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면 1/2의 확률로 자신의 유전자를 살리는 것이고 조카를 구하면 1/8의 확률이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건 직관적으로 금방 이해되는 주장입니다. 유명한 해밀턴의 규칙, b/c > 1/r가 적용됩니다. b는 협력이 가져오는 이익, c는 협력자가 치러야 하는 비용, 그리고 여기서 1/r은 우리 말로 치면 촌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입니다. 촌수가 가까울수록, 그리고 비용이 적고 이익이 클수록 협력이 일어날 가능성은 높은 거죠. 그러나 현실에서 아주 친한 친구라도 촌수는 무한대일 겁니다. 그래도 외국에서 처음 만난 한국 사람이 그렇게 반갑고 동향이라고 서로 돕는 건 혈연선택의 위력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릅니다.

둘째는 ‘직접 상호성’(direct reciprocity)입니다. 이 얘기는 우리가 단골의 예에서 찾은 겁니다. 앞으로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사기를 치면(무임승차하면) 결국 장기적으로는 손해라는 얘기죠. 이미 이 책에서도 몇번 소개한 죄수의 딜레마를 잠깐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상대방이 자백을 하건, 아니면 비밀을 지키건 나는 자백을 하는 게 유리합니다.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생각하게 되니 둘 다 자백을 하게 되고 결국 협력의 이익은 실현될 수 없습니다. 사교육을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협력(우리 모두 사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얼마나 행복해질까요?)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게임을 무한히 반복한다면(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 협력하는 게 유리합니다. 즉 맞대면하는 관계에서는 다시 만날 확률(게임이 반복될 확률=w)이 협력을 결정합니다. 즉 b/c > 1/w라는 관계가 성립합니다. 역시 협력의 이익이 크고 비용이 적다면, 그리고 게임이 반복될 확률이 충분히 크면 아무리 이기적인 사람이라도 협력을 하는 게 유리합니다. 즉 이기적이기 때문에 협력을 하는 셈입니다. 트리버스라는 유명한 생물학자는 이런 관계를 ‘상호적 이타성’이라고 불렀죠. 부품 업체와 장기 거래를 하고 경기가 나쁘다고 바로 해고를 하지 않는 과거의 일본 기업가가 대충 여기에 해당할 겁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전략은 전에 소개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TFT)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모두 협력을 하는 관계가 되면 그 다음은 그냥 “고생 끝, 행복 시작”일까요? 만일 집단 안에서 이기주의자가 생기거나(돌연변이) 밖에서 들어온다면(침입)? 이번 달의 첫 번째 문제입니다.

셋째는 ‘간접 상호성’(indirect reciprocity)입니다. 사실 우리가 두 번 이상 만나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까요? 그렇다면 직접 상호성에 의해서 인간 사회에 일어나는 협력을 설명하는 건 아주 제한적입니다. 항상 남을 돕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곤경에 처했을 때 우리는 도움을 주고 싶을 겁니다. 또 어떤 이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곧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겠죠(안 그러면? 나쁜 놈이죠) 이런 협력이 일어난다면 그건 평판, 명성 때문이라는 겁니다. 즉 간접 상호성은 주로 평판에 의해 유지된다는 거죠. 아닌 게 아니라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의 눈도 늘 의식하고 우리가 술자리에서 하는 ‘뒷담화’(gossip)는 곧잘 어떤 사람에 대한 태도를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평판을 좋게 유지하는 게 유리합니다. 말하자면 쓰리쿠션으로 협력을 자아낸다고나 할까요? 이 경우도 역시 자신의 장기 이익과 관련되어 있는 셈입니다. 간접 상호성이 협력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b/c > 1/q (q는 상대의 평판을 정확히 알 수 있는 확률)를 만족해야 합니다. 결국 사람들에 대한 정보가 정확히 알려져 있는 사회에서 협력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누굴 만나건 늘 협력을 하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이타적인 사람이 간혹 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한 평판은 어떨까요? 물론 좋겠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기주의자가 숨쉴 공간이 생기는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무임승차자에 대해선 TFT 전략대로 무임승차로 응징하는 게 올바른 행동일까요? 그런 사람에 대한 사회적 평판은 또 어떨까요?

집단이 존재하는 경우

우리는 지금까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에 대해 아무런 가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얘긴 모든 사람은 나머지 모든 사람과 같은 확률로 만나서 협력을 할 것인지, 무임승차(배반)을 할 것인지 결정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앞에서 얘기한 실험들도 역시 상대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채 만납니다. 그러나 실제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러 성향의 사람들이 골고루 섞여 있지 않습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나타났듯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들은 지지 정당이 확연히 다릅니다(다행히 많이 약해지고 있습니다만). 이제 이렇게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여 있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집단 차원의 선택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게 오늘 할 얘기입니다.

네 번째 규칙은 네트워크 상호성(network reciprocity)입니다. 최근 최정규교수의 논문에서는 ‘국지적 상호작용’이라고 옮겨 놓았습니다(최정규, 양재석, 조항현(2006), “구별짓기와 협조적 공진화”, 제1회 복잡계 컨퍼런스. “이타적 인간의 출현”에는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유유상종”이 유사한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보아 온 것 처럼 협력자와 무임승차자가 골고루 섞여있는 사회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한다면 무조건 무임승차자가 이깁니다. 그러나 현실의 공간 구조나 사회적 네트워크에서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이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만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정상입니다.

이런 공간구조의 분석은 무한대의 경우의 수를 가지기 때문에 수학적으로 분석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간단한 몇가지 가정을 한 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 보면 ‘네트워크 외부성’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골고루 섞인 상태에서는 완전히 소멸할 수 밖에 없었던 협력자들이 네트워크 클러스터를 형성해서 살아남고 그 클러스터의 힘을 바탕으로 무임승차자들의 영역을 정복해 나갑니다. 협력자들끼리만 모여 있으면 당연히 이익이 크고 남한테 당하는 착취는 없을테니까요.

여기서 관찰되는 규칙은 또 다시 b/c>k (k는 사람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평균)입니다(수학적으로는 모집단이 크고 약한 선택이 일어난다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즉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지 않을수록 협력은 촉진됩니다. 조금 이상한 얘길 수 있지만 거꾸로 모든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경우를 생각한다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모든 사람과 만난다는 것은 곧 골고루 섞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니까요.

제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지 못하고 이 쪽 글을 많이 읽어보지 못해서 그렇지만 이 네트워크 상호성은 일반적인 산업 클러스터 이론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실적으로도 지역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의식적으로 클러스터를 형성하려 한다든가, 귀농에 성공하기 위해서 이미 형성된 공동체에 들어 간다든가 몇 명이 같이 움직인다든가 하는 것이 아마도 여기에 해당될 겁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어쩌면 미국보다도 더 무임승차자로 가득찬 사회인데 이 곳을 떠나서 어디 괜찮은 사람끼리 모여 살 수 없을까, 가끔 꿈구는 것도 이 네 번째 협력 규칙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다섯번째입니다. 집단 선택이라는 겁니다. 골고루 섞여 있는 한 집단 내에서 협력자들은 소멸합니다. 또는 어쩔 수 없이 그들도 무임승차자처럼 이기적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협력자들로 이뤄진 집단이 있다면 이 집단은 무임승차자들의 집단보다 훨씬 더 적합도(fitness)가 높을 겁니다(요즘 용어로 경쟁력이 높을 겁니다). 예를 들어 희생정신이 강한 투사들이 모인 스파르타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얘깁니다.

즉 여기서는 두 차원의 선택이 일어나는 겁니다. 집단 내 선택(저차원)에서는 무임승차자가 생존하지만 집단 간 선택(고차원)에서는 협력자들이 유리합니다. 만일 집단 내에서는 협력자가 지지만 협력적 집단이 승리한다면 전체적으로 협력자들이 더 많은 사회가 될 수도 있겠죠. 이론 모형에서는 빠르게 성장한 집단이 일정 규모 이상이 되면 분화하고 뒤쳐진 집단이 소멸하는 걸로 설정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고대 사회처럼 한 부족이 다른 부족을 없애는 경우도 상정할 수도 있고, 현대의 상황이라면 어떤 집단이 협력자 집단을 흉내낼 수도 있겠죠. 현실적으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끼리 끼리 모여 살 수 있다면(assortation, 최정규교수는 유유상종으로 번역) 집단 선택은 현실에서도 관찰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수학적으로 보면 약한선택과 희소한 집단 분화를 가정하면 또 다시 앞에 나온 네 공식과 유사한 b/c > 1+(n/m) (n은 집단의 최대 크기, m은 집단의 수)이 성립합니다. 직관적으로 보면 한 집단의 평균 인구가 적을수록 협력이 잘 일어난다는 것인데 이것도 거꾸로 유추하면 이해됩니다. 한 집단의 평균 인구가 제일 큰 경우는 모두가 한 집단인데 이건 협력자가 소멸하는 상황과 똑같으니까요.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서 인간이 협력할 조건을 임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모든 규칙의 좌변에 나온 b/c부터 보면 당연히 b가 클수록, 또 c가 적을수록 협력이 일어날 확률은 높아집니다. 즉 협력자로부터 여러 사람이 얻는 이익이 클수록, 그리고 협력자가 치르는 희생이 적을수록 협력 행위가 많아지는 거죠.

다음 우변을 보면 차례로 피가 많이 섞일수록(싸이나 블로그의 촌수도 마찬가지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다시 만날 확률이 높을수록(게임이 반복될 확률이 높을수록), 그리고 사람들의 평판이 잘 알려져 있을수록(만날 사람이 협력자인지 무임승차자인지 잘 알 수 있을수록),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집단의 구성원이 적어서 협력자 집단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을수록 그 사회는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또 하나, 이런 논리적 추론에 따르면 완벽하게 협력자들로만 이뤄진 아름다운 세상은 또한 유토피아입니다. 그런 사회에 돌연변이나 이주(migration)에 의해서 무임승차자가 나타나는 순간 또 다시 세상은 이기적 인간으로 가득찬 무한 경쟁의 사회가 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위의 규칙과 다른 여러 특성을 반영해서 사회의 규범, 법률, 제도가 잘 만들어진다면 협력적인 사회가 꽤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음 달에는 협동조합 중소기업 위주로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는 이탈리아의 에밀리아 로마냐 지역에 관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의 경제학’(이 말 자체가 이 지역인 볼로냐 대학의 자마니 교수가 쓴 용어입니다)이 이뤄진 사회라고나 할까요?


Posted by moji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