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는 꽤 많은 정치인들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논문 들여다보는 게 일인 사람에겐 흔치 않은 일인데, 바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양자간 협정인 FTA는 말 그대로 아주 다양하다. 참여정부 이래 우리가 취한 전략은 “거대 선진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 FTA”이다. 고강도의 충격을 이리 저리 줘서 가장 경쟁력 있는 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약한 부분도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하며 혹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미 FTA와 한·EU FTA는 기실 농업과 중소제조업을 버리고, 수출대기업과 서비스산업으로 경제를 꾸리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국의 삼성 등 재벌, 그리고 기획재정부는 한 마음으로 네트워크 서비스산업, 그리고 의료와 같은 공공서비스 산업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노리고 있다. 한국의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를 개방하고 민영화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중 FTA는 사뭇 다르다. 중국은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의 협상을 기피할 것이 확실하다. 최근 중국·뉴질랜드 FTA 이래 이런 신이슈를 포함한 것들이 있지만 한국에 이들 분야를 강하게 요구해서 제조업의 개방 수준을 높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상품무역 분야의 이익도 미국과 EU에 비해서 훨씬 클 것이다. 2010년 대중국 수출은 1168억 달러였고(금년에는 전체 수출의 4분의 1에 이를 것이다) 흑자는 452억 달러로 전체 흑자의 80%에 달했다. 중국의 단순 평균 관세율은 9.7%이지만 관세환급을 고려하면 약 2.7%에 해당한다. 따라서 관세를 0으로 낮추기만 해도 당장 약 55억 달러 정도의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농업과 중소기업이다. 한·중 FTA는 한·미 FTA와 한·EU FTA 이후 유일하게 남은 신선채소나 과일마저 궤멸시킬 것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은 아주 밀접한 분업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산업내 무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특히 전기나 비철금속, 정밀화학, 건설기계산업의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은 자국 기업 하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 집요하게 개방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다. 또한 자국의 완성차나 전자산업의 유치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한국에도 양보해야 한다. 박태호 신임대표가 “농산물을 대폭 개방하는 높은 수준의 협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1월 12일 박태호 통상교섭본부장이 외교통상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중 FTA의 의의와 진행과정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경향신문DB)

 
 
현재는 국익 최대화를 내거는 제로섬 게임 방식의 FTA 전략 전체를 수정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런 방식으로 전개된 WTO 룰마저도 바뀌어야 하는데(예컨대 신이슈 규정과 농업분야는 모두 개정해야 한다) 구식 FTA를 또 맺는 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이다. 이제 새로운 교류 형식을 창안해야 하고, 이는 차기 정부가 장기적인 세계 경제 전망과 산업구조, 복지사회에 대한 전략 속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미국의 대아시아 전략을 고려할 때 한국과 중국 모두 외교·안보적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왕 그럴 거라면 장차 세계 속에서 동아시아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에 대한 역내 국가 간에 합의를 하고 그에 걸맞은 교류방식을 택해야 한다. 한 마디로 ‘경쟁해’가 아니라 ‘협동해’를 찾아야 한다.
 
누가 봐도 상호이익이 크기 때문에 쉽게 협동해를 선택할 수 있는 사업은 얼마든지 있다. 외환보유액 여유분의 북한과 중국 내륙 투자, 황사 방지를 위한 환경협력, 시베리아 가스관 사업, 중국 쪽 대륙간 철도 연결, IT산업 표준 사업 등 무궁무진하다. 중국과의 국제협정은 FTA가 아니라 공동체적 협력을 목표로 한 새로운 유형의 세계 표준을 동아시아에서 만들 수 있는 기회다. 중국이 홍콩과 맺은 ‘성과확대형 CEPA’는 이런 구상의 맹아적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구상 없이 실행하는 한·중 FTA는 또다른 의미에서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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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FTA 어떻게 볼 것인가

 [목차]
1. 한미 FTA와 한중 FTA의 차이
2. 동아시아 협력과 복지국가를 열어갈 새 틀 필요
 
 
[본문]
1. 한미 FTA와 한중 FTA의 차이
 
기본적으로 양자간 협정인 FTA는 말 그대로 아주 다양하다. 참여정부 이래 우리가 취한 전략은 “거대선진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 FTA"이다. 고강도의 충격을 이리 저리 줘서 가장 경쟁력 강한 산업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경쟁력 약한 산업도 경쟁 속에서 살아아야 하며 혹 죽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미 FTA와 한EU  FTA는 기실 농업과 중소 제조업을 버리고, 수출대기업과 서비스 산업으로 경제를 꾸리겠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한국의 삼성을 대표로 한 재벌 그리고 기획재정부는 한 마음으로 네트워크 서비스산업, 의료와 같은 공공서비스 산업을 노리고 있다. 이게 바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를 개방하고 민영화하겠다는 미국의 전략과 정확히 일치한다.

경향신문DB

 
 
한중 FTA는 사뭇 다르다. 중국은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 분야와 같이 최신 통상 이슈에서의 협상을 기피할 것이 확실하다. 최근 이루어진 중국-뉴질랜드 FTA 중에는 이런 최신 통상 이슈를 포함한 것들이 있지만, 한국에 이들 분야를 강하게 요구해서 자국 제조업의 개방 수준을 높이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중 FTA에서는 한미 FTA의 가장 큰 문제인 공공서비스 개방과 민영화의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상품무역 분야에서의 이익도 미국과 EU에 비해서 훨씬 클 것이다. 2010년 대중국 수출은 1168억 달러로 전체 수출의 4분의 1에 달했으며, 흑자는 452억 달러로 전체 흑자의 80%에 달했다([그림1]과 [그림2] 참조). 중국의 단순 평균 관세율은 9.7%이지만 관세환급을 고려하면(한국이 중국에 부품을 수출하고 그 부품을 사용한 상품이 다른 나라로 수출되면 관세를 환급해준다) 약 2.7%에 해당한다. 따라서 관세를 0%로 낮추기만 해도 당장 약 55억 달러(약 1168억 달러×0.027)정도의 이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농업과 중소기업이다. 한중 FTA는 한미 FTA와 한EU FTA 이후 유일하게 남은 신선채소나 과일을 궤멸시킬 것이다. 또한 한국과 중국은 아주 밀접한 분업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산업내 무역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특히 전기나 비철금속, 정밀화학, 건설기계산업의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표1] 참조).
 
다행히 중국은 자국 기업 하나 하나의 이익을 위해 집요하게 개방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정치경제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미국은 주별로 특정 산업이 있어서, 각 주의 의원이 전체를 고려하지 않고 지역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지만, 강력한 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의 통상협상은 전체 이익을 목표로 한다. 또한 자국의 완성차나 전자산업 등 유치산업을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도 무리하게 취약 산업 개방을 요구할 수 없다. 미국처럼 전 분야에서 경쟁우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태호 신임대표가 “농산물을 대폭 개방하는 높은 수준의 협상”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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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

외우내환, 2012년 한국경제 전망
전망기획③ 2012년 한국경제 전망과 허와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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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내용은 들쭉날쭉, 결과는 비슷하다.

2, 세계경제 성장률 3.5%내외는 합리적 전망일까?
3. 환율 1100원 대의 성립조건
4. 민간소비가 작년보다 올라갈까?
5. 설비투자는 희망이 될 수 있을까?
6. 건설투자가 한국경제를 이끌어 갈 거라고?
7. 또 다시 수출이 한국경제호를 구할까?


[본문]

1. 내용은 들쭉날쭉, 결과는 비슷하다.

 
한국정부가 자못 진지해졌다. 예년 같으면 한은의 경제성장율 전망에 0.5% 정도를 얹어서 정책의지를 만천하에 알렸던 기재부가 이번엔 거의 같은 수치를 내놓았다.
실로 사태의 심각함을 아는 것일까? 기획재정부 업무보고에서 엉뚱하게 물가를 문제 삼는 ‘경제대통령’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지만. 우선 각 기관의 경제성장율 예측을 들여다보자.


 
케인즈의 “미인대회”처럼 우리의 각종 기관들도 전망치를 서로 서로 맞추는 게임을 한 걸까?(이런 전망에서는 튀지 않는 게 낫다. 혼자 틀리면 망하지만 같이 틀리면 보통은 되니까) 올해 우리 경제는 약 3.6% 내외의 성장을 할 것으로 보인다. 작년이 3.8% 정도니까 올해도 그럭저럭 작년 정도라는 얘기다. 그러나 내부를 들여다 보면 사뭇 다른 수치들도 발견된다. 서로 다른 원인으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얘기다.
 
우선 세계경제 성장률은 거의 모든 기관이 3.5% 내외로 전망했다. 지난 2011년 9월과 11월에 발표된 IMF와 OECD의 수치를 수용한 것일테니 그리 탓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환율은 세계경제의 움직임, 특히 유럽사태의 향방에 따라 요동을 칠텐데 이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으니 대체로 1,050원(삼성)부터 1,110원(국회예산정책처, 이하 예정처)대까지로 잡고 유가는 100달러 전후를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내부는 다르다. GDP의 50% 가량을 차지하는 민간소비는 2.5%(삼성)에서 3.2%(한은)로 상당한 차이가 난다. 예정처와 삼성은 민간소비가 작년과 유사하거나 조금 낮은 증가율을 보일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정부와 한은 0.6%p 정도 소비 증가율이 늘어난다고 예측한 것이다. 이것은 GDP 0.3%p의 차이에 해당된다.
 
설비투자 역시 많은 차이가 나는데 이번엔 두 재벌 연구소인 삼성(4.5)과 LG(2.3)가 가장 많이 차이가 난다. 한은은 정부보다 0.9%p 정도 낙관적인 증가율을 내 놓았다. 설비투자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10% 이므로 1%p의 예측 차이는 GDP 0.1%의 차이를 낳는다.
 
건설 역시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차이가 난다. 예정처는 -0.6%인 반면 정부와 한은은 3% 약간 못 미치고 LG는 3.4%이다. 최소와 최대가 4%p나 차이가 나는데 이건 GDP로 환산하면 약 0.6%에 해당한다.
 
수출 전망(통관)은 더 큰 차이가 나는데(삼성과 한은의 차이는 6.9%p) 국제수지통계 처리의 변화(한은은 국제수지매뉴얼 1단계 이행에 따라 선박수출 계상방식을 변경했다)가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다.
대외부문은 경상수지 수치로 GDP에 반영되는데 경상수지가 125억 달러(삼성)에서 160억 달러(정부)까지 차이가 난다. 45억 달러면 약 0.45%p 이상의 차이가 나지만 환율을 어떻게 예상했느냐에 따라 또 달라질 수 있다.

 
도대체 어느 통계가 진실에 가까울까? 요즘 언론처럼 최종 결과인 경제성장율을 어느 기관이 언제 맞췄느냐고 따지는 건 소일거리에 불과하다. 여러 군데 틀려서 결과만 우연히 일치했을 가능성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나 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2. 세계경제 성장률 3.5% 내외는 합리적인 전망일까?
 
금년 세계경제 성장률을 좌우할 큰 변수는 유럽 사태가 어떻게 수습되느냐이다. 또 선진국들이 모두 장기침체의 양상을 보일 때 중국이나 인도가 얼마나 뒤를 받쳐 줄수 있는가도 중요한 변수이다.
 

유럽사태의 원인과 전망에 관해서는 이미 연구원에서 작은 책자 낸 바 있는데(새사연 홈페이지, 시사인 참조) 결론은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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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유럽의 꿈, 기사회생 가능한가
유럽의 위기와 한국 

 
 
2011 / 12 / 28 정태인/새사연 원장


 

 [목차]

1. “유럽의 꿈은 사라졌는가”

2.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와 한국경제에 대한 함의


 

[본문]

“유럽의 꿈은 사라졌는가”

1915년 레닌은 “유럽합중국에 대하여”라는 글을 썼다. 결론은 제국주의국가들끼리 지분을 평화롭게 분할하는 합중국은 불가능하니 헛소리 집어 치우라는 것이다. 굳이 흘러간 옛 얘기를 꺼낸 것은 당시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도 혹할 만큼 ‘유럽합중국’ 또는 유럽공동체는 유럽의 ‘오래 된 미래’였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다. 92년 마스트리트 조약을 맺고 99년 유로를 창설하면서 이 오랜 꿈은 실현되는 듯 했다. “유럽의 꿈”은 사라졌는가?”

 

지난 세 번의 연재로 현재 유럽 위기의 원인은 명확히 드러났다. 유럽의 문제는 내부 문제이다. 통화는 통합됐으나 재정은 통합되지 않았고 경쟁력이 약한 남부유럽의 곤경에 대해 독일 등 북유럽은 보조금을 주려 하지 않는다. 부르마교수(바드대)가 한탄한대로 “유럽 시민”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재정적자가 아니라 “민주주의 적자”(democracy deficiency)가 문제라는 것이다. 독일은 90년 동서독 통일 후 10년간 막대한 돈을 투입한 경험을 재현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남유럽 국가들의 방탕을 비난함으로써 공동체의 의무를 외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프랑크푸르트 점령' 시위대가 3일(현지시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럽중앙은행(ECB) 앞에 있는 유로화 조각 부근에서 불을 피우고 있다. 이날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유럽연합(EU)의 금융지원안에 대한 국민투표 철회 의사를 밝히고 ECB가 예상밖의 금리인하 결정을 내리자 미국과 유럽의 증시가 일제히 상승했다. 2011/11/08 (화)

12월 9일의 유럽 정상회의는 엉뚱하게도 재정긴축을 강화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오루크교수(옥스퍼드대)의 말대로 필요한 것은 “재정동맹”(fiscal union)인데 독일은 “재정안정동맹(fiscal stability union)”을 요구했고 이 회의는 기사회생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정상회의(summit to the death)”로 끝났다. 이제 재정적자는 “투자적자”(investment deficiency, 스펜스)로 이어진다. 케인즈의 “평화의 경제적 귀결”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이 팸플릿에서 케인즈는 제1차 대전 이후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금을 물리도록 한 베르사이유 협약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한마디로 영국과 프랑스는 총수요를 외면한 인기영합적 결정을 내렸고 결국 자기 발등을 찍으리란 것이었다. 이제 그 주역만 독일로 바뀌었다.

 

유로가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유로존이 축소되면 강한 나라들의 “수퍼유로” 가치는 치솟을 것이고 북유럽 흑자의 대부분을 감당했던 “최종소비자” 남유럽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남유럽 국가들은 이제 유로로 표시된 채무를, 형편없이 평가절하된 드라크마(그리스)와 리라(이탈리아)로 갚아야 하는 ‘고난의 행군’을 해야 한다. 임금과 디플레이션이라는 “내부 평가절하”도 만만치 않다. 루비니에 따르면 “앞으로 몇 년간 가격과 임금이 30% 정도 떨어져도 부채의 실질 가치는 계속 증가할 것이고 정부와 민간 채무자의 지급불능 사태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흑자국인 북부유럽(독일, 네델란드, 오스트리아, 그리고 프랑스)마저도 깊은 침체에 빠질 것이다.

 

오루크는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관료의 민주주의에 대한 우위, 반 유럽 감정의 고조, 대중영합주의 정당의 득세가 나타날 것이고 폭력의 난무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음울한 예측을 한 뒤, 이런 시나리오를 피하는 데 필요한 제도 변화를 이루지 못할 거라면 빨리 죽는 게 낫다고 선언했다. 과연 유럽의 꿈은 사라진 것일까?

 

유럽공동체의 실패는 재정의 문제를 신자유주의적 금융(타국 은행에 의한 국채 매입)으로 해결하려 한 데 있다. 길은 아직 남아 있다. 재정통합같은 중장기 계획(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 조약을 개정해야 한다)을 실행하기 이전에 긴급조치부터 취해야 한다. 일단 유럽 중앙은행이 부실채권을 사들이고 이후에는 통화증발을 해서 유로의 가치를 떨어뜨려야 할 것이다. 동시에 재정적자를 감수하고라도 교육과 의료, 그리고 약한 나라의 인프라 건설에 돈을 써야 한다. 그 이후에야 유럽중앙은행의 강화나 재정통합, 그리고 구조개혁이 가능할 것이다.

 

또 하나 떠올릴 수 있는 정책은 케인즈의 청산동맹 구상이다. 케인즈는 브레튼우즈 회담에서 무역적자국에 돈을 빌려주는 청산기금(나중에 IMF가 되었다)을 구상하면서 흑자국도 그 규모에 따라 일종의 벌금을 물도록 하는 청산동맹을 제안했다. 유로라는 단일 통화를 사용하는 한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무역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유로존 내부에서 실행할만한 제안일 것이다. 현재의 글로벌 위기를 극복하는 데 유효한 제안이라면 유로존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이다.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와 한국경제에 대한 함의

 

“동북아 대통령이 되시라”는 단 한마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고 노무현 대통령은 나를 “동북아 비서관”에 임명했다. 미국과 EU, 그리고 동북아 공동체로 천하를 삼분해야 안정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내 주장은 당연히 EU를 모델로 했다. 해서 동북아 위원회는 EU형 길을 집중 검토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유럽의 경우 미국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유럽 공동체를 용인했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미국의 주적인 중국이 동아시아 내부에 있고 더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일취월장 해서 G2의 반열에 올랐기 때문에 미국의 견제가 훨씬 심해질 것이다. 또한 유럽에 비해서 인종, 문화, 종교가 제각각이고 영토분쟁, 역사분쟁도 현재진행형이라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유럽의 위기는 설상가상의 문제를 던져 주고 있다. 나는 최근까지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특히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의 경우에는 통화통합이 먼저 이뤄질 수도 있다는 ‘망상’까지 했다. 1997년 동아시아 위기가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를 현실화했고 최근의 위기로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에 AMF(아시아 통화기금)로 발전할 전망이 훨씬 밝아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금융위기는 달러의 위상을 여지없이 흔들었고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통화체제로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이 중 지역통화를 거쳐 새로운 기축통화로 넘어가는 아이켄그린의 경로가 가장 현실적으로 보였으니 아시아 통화(예컨대 ACU)의 창설마저 그럴듯해 보였다.

 

그러나 유럽의 위기를 목도하고 있는 지금, 모든 것을 원점에서 재점검해서 더 엄격한 필요조건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공동체가 원활하게 흘러가기 위해서 역내 경제 격차는 현재의 유럽 수준보다도 더 좁혀지지 않으면 안된다. 재정통합 없는 통화통합은 역내 격차를 위기로 몰고 갈 것임에 틀림없다. 이를 위해서 현재 4조 달러를 넘어선 동아시아의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공동관리하면서 여유자금(약 2조 달러)을 북한이나 몽골, 중국 내부 등 후진 지역에 투자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재정통합을 위해서는 역내 후진 지역에 대한 보조금이 가능할만큼 “동아시아 시민의식”이 성숙되어야 한다. 현재 곳곳에서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 분쟁, 영토분쟁을 고려하면 전혀 낙관적이지 않은 대목이다. 동아시아 공동의 역사기술, 청소년 문화교류부터 시작해서 동아시아 시민이라는 귀속감을 높여 나가는 프로그램이 시급하다. 환경-에너지 협력도 시급한데 현재 추진되고 있는 시베리아 가스관 사업은 훌륭한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공동의 프로젝트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세계경제의 앞날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다. 중국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보였지만 유럽과 미국, 일본이 동시에 침체에 빠진다면 수출의존도가 높은 중국이 독야청청하리란 전망은 ‘희망사항’에 가까울 것이다.

 

한은과 정부는 내년 우리가 경제가 3.7% 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는 세계경제가 3.6% 성장할 것이라는 IMF와 OECD의 11월 초 전망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히 OECD는 유럽 재정위기의 전개를 시나리오 별로 기본(baseline), 낙관, 비관으로 나눠 이에 따라 세계경제성장율을 각각 3.4%, 4.0%, 2.1%로 예측했다.

 

그러나 유럽 일부 국가가 무질서한 국가부도에 빠지고 이들 나라의 국채를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 독일의 은행들이 파산하는데 세계경제성장율이 2.1%를 유지한다는 게 합리적인 전망일까? 내 보기에 가장 그럴듯한 것은 UN의 최근 전망(“World Economic Situation & Prospect", 2011.11) 이다. 똑같이 유럽의 상황을 기준으로 세 시나리오 별로 UN은 각각 2.6%, 3.9%, 0.5%로 예측했다. 낙관 시나리오의 경우 OECD와 유사하지만 기본인 경우 0.8%p, 그리고 비관은 1.6%p나 차이가 난다.

 

현실 경제에서 통용되는 주먹구구 계산법에 따르면 세계경제성장율이 1% 줄어들 때 우리 수출 증가율은 약 4% 감소한다. EU가 그럭저럭(muddling through) 사태를 수습하는 기본 시나리오라 해도 UN의 예측에 따르면 세계경제는 정부 가정보다 1% 덜 성장한다. 따라서 한국의 경제성장율은 1.6% 정도(4%*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 40%) 추가로 감소한다.

 

한국에서 투자는 수출증가율에 강하게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투자증가율도 줄어들 것이다 또 정부는 내년에 소비가 금년의 증가율보다 0,5%p 높아져서 3.2%나 증가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백화점 매출도 줄어드는 지금 이 예측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그야말로 “야성적 충동”에 의존하는 투자를 빼더라도 내년 경제성장율은 정부의 예측에 비해 2% 가까이 낮아질 것이다. 내년 우리 경제의 앞날은 어둡다. 특히 부동산 거품, 그리고 이와 연계된 가계부채 폭탄이 터질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다. 내년 총대선은 이런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대안에 대한 시험대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시사인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Posted by mojiry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떠나간 기차가 아니다. 우리는 눈물 흘리며 손수건 흔드는 배웅객이 아니라 기차에 타고 있는 여행자다. 애초에 타지 말았어야 할 기차지만 얼결에 올라탔으니 최선을 다해서 기차가 탈선하지 않도록 하고 낭떠러지에 이르기 전에 내려야 한다.

우선 대통령이 비준 절차를 중단해야 한다. 모든 협정은 국회를 통과한 뒤에 대통령이 준수에 관한 서한을 상대국에 보내야 한다. 통과되자마자 좋아라 편지를 부친 게 아니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왜 국민이 반대하는지 귀를 기울여야 한다.

둘째, 한나라당은 한-미 에프티에이 협정과 함께, 이 협정과 어긋나는, 이른바 비합치 법률 14개를 통과시켰다. 앞으로도 더 많은 법률과 조례가 개정될 것이다. 통과된 법률이 국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앞으로 또 어떤 법이 개폐될 것인지 조사하고 이를 막아야 한다.
예컨대 국회 끝장토론에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우리 농산물로 급식을 하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과거 대법원에 우리 농산물 급식이 세계무역기구(WTO) 협정 위반이라는 의견을 제시해서 수많은 조례를 개정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부처의 수장이 말을 바꾼 것이다. 우리가 누누이 강조했던 ‘위축효과’(chilling effect)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렇다. 우리가 따지면 따질수록 공무원들이 지레 겁먹고 정책을 포기하는 일이 줄어든다. 유통법-상생법이 바로 좋은 예이다.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토론에서 나는 정부가 암에 대해서 100%를 보장하면, 즉 암 치료비를 한푼도 내지 않도록 하면 투자자-국가 중재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민은 당연히 에이아이지(AIG) 암보험을 해지할 것이고 이른바 최소기준대우(국제관습법상 과도한 정책인가, 아닌가) 위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정부는 의료는 예외조항이기 때문에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당장 건강보험 보장성을 90% 이상으로 올리자고 요구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 주장과 달리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경우 고치도록 압박해야 한다.


셋째,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자발적 민영화와 규제완화다. 사실 한-미 에프티에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서비스분야였다. ‘경쟁적 자유화’라는 미국 에프티에이의 전략을 창시한 로버트 졸릭(현 세계은행 총재)이 공언한 대로 공공서비스 민영화와 규제완화야말로 미국 에프티에이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6년 협상 과정에서 이 분야에서는 별다른 잡음이 흘러나오지 않아 자못 의아했는데, 그 비밀은 우리 스스로 민영화를 추진한 데 있었다. 우리 협상단은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민영화 법안들, 예컨대 자본시장통합법, 병원 영리법인화, 약사법 개정 등을 제시하고 협정문에 명기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미래유보에 들어 있는 분야들, 예컨대 전기, 철도, 가스, 우편 등 네트워크 산업과 건강보험을 재벌들의 바람대로 자발적으로 민영화하고 그 부분에 미국 투자자가 들어오면 그다음부터는 거꾸로 돌아갈 수 없다. 영국은 철도를 마거릿 대처 총리 시절에 민영화했다가 대형사고가 빈발하자 시설부문을 다시 국유화했다.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컨대 코레일 민영화 이후 일부 주식을 미국인이 사들이면(재벌들은 분명히 미국인 투자자를 끼워넣을 것이다) 그 순간부터 재국유화는 100% 투자자-국가 중재의 대상이 된다. 정부와 한나라당의 자발적 민영화를 감시하고 막아야 한다.



자발적 민영화가 일어나면 한-미 에프티에이뿐 아니라 한-유럽연합(EU) 에프티에이 등 다른 모든 에프티에이도 동시에 작동한다. 한-미 에프티에이를 폐기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 투자자들은 다른 투자협정을 이용해서 투자자-국가 중재를 요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최혜국 대우’(앞으로 어떤 나라에 지금 수준보다 더 많이 개방하면 미국이나 유럽연합에도 똑같은 수준으로 개방해야 한다)라는 세계 최초의 조항도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아무도 모른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잠시도 눈을 떼어서는 안 된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앞으로 빈발할 크고 작은 금융위기에 대해서 정부의 긴급조처를 무력화할 것이다. 2001년 금융위기 이후 아르헨티나가 취한 긴급조처를 두고는 2009년까지 무려 47건의 투자자-국가 중재가 제기됐고 지금도 계속 늘어나고 있다. 바다 건너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이명박 정부가 시행한 거시건전성부담금(은행세), 외국인 채권구입 면세 환원 조처도 한-미 에프티에이가 발효된 상태였다면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대량살상무기’인 파생상품도 무제한 들어올 것이다. 협정문상 건전성 사유로 규제할 수 있지만 사전에 그런 위험성을 증명할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소비자가 수익이 높다는 데 현혹되어 ‘파워인컴펀드’와 같은 파생상품을 구입하지 않아야 한다.

한-미 에프티에이는 시장만능주의라는 구시대 이데올로기의 완결판이다. 투자자의 재산권을 인권과 생명권보다 우선시하는 협정이다. 이제 전세계는 공공성 강화와 정책공간 확보로 움직이고 있다. 여전히 월가의 힘이 강해서 지지부진하긴 하지만 주요 20개국(G20)의 의제가 바로 그런 것들이다.
한-미 에프티에이가 발효된다 하더라도 그 폐해를 최소화하고, 때를 기다려 낭떠러지로 향하는 기차에서 내려야 한다. 끝난 것은 ‘한-미 에프티에이 시즌1’이고 이제 ‘한-미 에프티에이 시즌2’가 시작되었다. 신발끈을 고쳐 매고 촛불을 들어야 한다. 자연과 아이들을 살리고 싶다면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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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면산 기슭에 자리한 연구원 마당에 가을이 흔전만전 떨어지고 또 굴러다닌다.

몽롱한 노랑과 적갈색으로 화면을 가득 채웠던 영화, "뉴욕의 가을"도 주코티 공원에 내려 앉았을 것이다.

"독재타도"를 외친 "아랍의 봄"은 철을 따라 "월스리트를 점령하라"며 "뉴욕의 가을"에 다다랐다.


아랍의 젊은이들은, 선진국의 비호 아래 한 나라의 지하자원을 비효율적으로 사용하던 아랍 시스템을 붕괴시켰고 이제 미국 젊은이들이 제국의 심장에서 전 세계를 거품 속으로 몰아 넣었던 '글로벌 스탠다드'를 위협하고 있다.

정확히 10년 전, 상징적 하드웨어였던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무너졌고 바로 그 옆에서 젊은이들은 그 소프트웨어를 겨누고 있다.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시스템"이 그 대상이다.



“노(무현)대통령은...선진 시스템을 갖춘 국가와 FTA를 체결해 우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김현종, 한미 FTA를 말하다" 59쪽).

한미 FTA의 본질을 이렇게 잘 표현해 주는 증언도 없다. 바로 그 선진 시스템이 붕괴한 것이다.

2008년 가을 봉하쌀이 일렁이는 황금빛 들판을 보면서 퇴임 대통령은 이렇게 토로했다.

 "
한미간 협정을 체결한 후에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우리 경제와 금융제도 전반에 관한 점검이 필요한 시기…한미 FTA 안에도 해당되는 내용이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고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고쳐야 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노무현의 후계자를 자임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진지하게 이 우려를 검토하지 않았다.

봉하에 불려간 사람은 지금 미국에서 이명박 대통령과 축배를 들고 있을 한덕수 주미대사, 그리고 처음 "선진통상국가론"의 아이디어를 낸 조윤제교수였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말을 했을까? 잠깐의 혼란이 지나가면 곧 안정을 되찾을 거라고, 그래서 한미 FTA가 담고 있는 글로벌 스탠다드는 영원할 것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중국의 위협 때문에 우리는 하루빨리 금융 등 서비스업으로 특화해야 하며 한미 FTA는 그 금융허브의 꿈을 실현해줄,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는 그들의 무기였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재경부에서 기획재정부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1%를 위한 관료들은 영원하며 이들은 2008년 여름, 흔들리고 있던 리만 브라더스를 인수할 계획까지 검토한 바 있다.

한미 FTA는 특히 서비스, 지적재산권, 투자분야의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명시적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현재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에 100% 역행한다.

한미 FTA를 대상으로 한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우려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정책을 내 놓은 것은 이명박 정부의 신현송 국제경제보좌관이었다.

선물환 포지션 한도 규제, 외국인 채권 구입에 대한 면세 환원, 거시건전성 부담금(Bank Levy) 등 일련의 거시건전성 규제 정책이 그것이다.

기획재정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책이 가능했던 것은 이명박 정부 내에서 그만큼 세계금융위기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은 없었고 또 대통령의 총애 덕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아마도 작업 팀은 이들 조치가 한미 FTA에 저촉되지 않는지 꽤나 신경을 썼을 것이다. 실제로 한미 FTA가 발효돼 있었다면 이들 정책은 모두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으며 특히 외국인 면세 환원조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실로 “많은 양자간, 지역 무역협정은, 각국이 적절한 규제와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개혁과 경기 패키지에 의해 현재의 위기에 대응할 능력을 제한한다”(스티글리츠 보고서).

2009년 -7%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한 멕시코, 그리고 2001년 아르헨티나의 비극이보여 주듯이 한미 FTA는 위기의 전파 통로가 될 뿐 아니라 위기에 대한 긴급조치마저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왜 이미 파산이 증명된 시스템, 미국 내에서조차 격렬한 저항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그 시스템을 우리 땅에 직수입해야 한다는 말인가?

초록이 지쳐 단풍 든다고 한 건 역시 서정주였던가. 우리 모두 지쳤다.

하지만 마지막 힘을 다해서 세상을 수놓은 붉은 단풍처럼 촛불을 이 땅 곳곳에 켜야 한다.

지금 1%가 끌고 올라타려는 난파선에서 우리 99%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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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촛불, 그리고 한미 FTA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지난 일요일, 월스트리트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가 나타났다. 그는 시위의 성격에 대해 “1%에 의한, 1%를 위한, 1%의” 미국, 정부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들은 소통을 원하는 것이라고, (그 날 MSN에 출연해서) 금융위기의 원인, 정부가 한 일,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관해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티글리츠와 마찬가지로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크루그만은 이 새로운 대중운동이 월스트리트라는 올바른 표적을 잡았으며 궁극적으로 대전환으로 판명날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미국 정치에서 정의가 제대로 이긴 적이 없다는 데 시민들이 분노한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이번만 해도 첫째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가들은 규제완화를 이용해서 거품을 만들어 거대한 폭리를 취했고, 둘째 거품이 터지자 시민들의 세금으로 구제되었는데도 셋째, 그들은 정치가들이 금융에 부과된 세금을 낮추고 위기 직후 만들어졌던 약한 규제마저 풀도록 만드는 것으로 시민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연히 월스트리트가 적이다.

 

시민들이 모르는 것이 아니다. 시위를 맨 처음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광고없애기”(Adbuster)운동은 “가장 간단한 요구로 시작한다. 정치에서 돈을 분리시키는 대통령 위원회를 만들라. 우리는 새로운 미국을 향한 의제를 만들고 있다”고 선언했다. “익명”(Anonymous)의 활동가들은 “맨하턴을 사람들로 넘치게 하라, 텐트를 세우고 부엌, 평화의 바리케이드를 만들어라, 그리고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고 호소했다.

 

이제 시위는 “부자에게 세금을”, “기업에 세금을”, “기업복지를 끝장내라”, “노동조합을 지원하라”, “메디케어(미국의 하층민 건강보험)와 사회안전망을 지키자”, 또 “미국연방준비은행을 감시하라” 또는 “없애 버려라”, “값싼 건강보험을 달라”, “군산복합체를 해체하라”, “전쟁을 끝내라”, 백화제방의 주장이 쓰나미를 이루고 있다.

 

오바마의 미약한 의료보험 개혁에 대해서도 “사회주의자”, “히틀러”등의 비난이 쏟아졌던 데 비하면 이들의 젊은 목소리는, 무너져 가는 미제국의 마지막 희망이다.

 

촛불, 그리고 한미 FTA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에 가서 쇠고기 완전 수입자유화를 약속한 데 분노해서 시작됐던 2008년 촛불시위는, 우리의 여중생들이 시작했던 그 촛불 축제는 무려 6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살고 싶어요, 자고 싶어요”, “0교시 반대”, “4대강 사업 반대”, “의료민영화 반대”로 의제가 확산됐다. 여기서도 부자감세 등 1%를 위한 정책, 날로 심해지는 양극화가 핵심이슈였고 휴대전화와 인터넷 방송이 우리의 무기였다. 말하자면 “점령하라”의 원조는 대한민국 “촛불”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소통을 원했다. 서울광장을 ‘점령’하려고, 상징으로라도 청와대를 점령하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 뒷산에서 눈물까지 흘렸다지만 “명박산성”을 쌓아 소통을 완강하게 거부했고 시위가 잦아들자 벌금과 구류, 나아가 구속으로 맞대응했다. 쌓이고 쌓인 분노는 작년의 지자체 선거, 그리고 금년의 “무상급식 찬반 투표”로 표출됐다. 앞에 놓인 서울시장 등 재보궐선거, 그리고 내년의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에서도 우리는 “종이 짱돌”을 던질 것이다.

 

그러나 단지 정권 교체만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월스트리트가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모두 매수했다는 사실, 그래서 자신들의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우리 역시 잘 알고 있다. 삼성 등 재벌의 돈이 얼마나 위력이 있는지, 조중동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지, 우리의 힘과 요구를 보여주지 않으면 정치인이 얼마나 제 앞의 이익만 챙기는지, 또 얼마나 상상력이 없는지...

 

한미 FTA를 슬그머니 통과시키려는 국회가 이런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미국 젊은이들이 분노하는 미국 시스템을 한국에 직수입하자는 게 한미 FTA다. 다시 한번 일어나자. 지난 4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그런데도 미래가 얼마나 어두운지 정치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그럴 때만 실제로 우리의 미래가, 그리고 아이들의 삶이 열린다. 이제 내년 대선을 앞두고 등록금을 어떻게 내릴지, 사교육을 그대로 놔둬도 괜찮은지, 4대강은 어떻게 되살릴지, 의료민영화 저지를 넘어 건강보험 보장성을 어떻게 강화할지, 재벌은 어떻게 규제할지, 가장 폭넓게 우리의 복지를 어떻게 설계할지 토론하자. 그리고 다시 한번 대통령에게 소통을 요구하자. 내년 의원후보, 대통령 후보들에게 요구하자. 세계는 변하고 있고 우리가 그 선봉이었다. 이제 그 변화를 최초로 제도화하는 나라가 되자. 월스트리트의 젊은이들에게 해법을 알려주자. 그게 존경받는 나라, 저들이 외쳐대는 “선진국”이 아니고 그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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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금요일(21일) 경향신문에 실릴 글의 원본입니다. 경향 원고는 이 글을 반쯤으로 줄인 겁니다.

 

15년 뒤 대한민국은?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한미 FTA로 경제영토가 넓어집니다. 이제, 세계가 당신의 시장입니다” 요즘 지하철에 나붙은 광고 문구이다. 5년 전에는 이랬다. “한미 FTA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우리의 선택입니다” 당시에 함안의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인자 쪼께 살까 싶었어요. 그랬두만은... 우찌 됐든 (FTA를) 끝내 막아서...행복하게 살아야 할긴데... 이런 말 저런 말 하면 눈물 나온다“ 평생의 노동으로 갈쿠리가 된 손으로 눈가를 훔치는 이 광고는 아무도 TV로 보지 못했다. 사실상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그해 한미 FTA 국내 홍보비로 130억원을 책정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미국 로비비용으로 95억 5600만원을 사용했다. 그도 모자라 또 다시 2억 5천만원을 들여 이렇게 대대적 홍보에 나선 것이다. 그들로서는 ‘최후의 일격’인 셈이다. 한미 FTA는 이제 국회 비준만 남았다.

벌써 5년째 우리는 한미 FTA라는 유령과 싸우고 있다. 2006년 KBS 이강택 피디는 “나프타 12년, 멕시코의 명과 암”(KBS 스페셜)을 내보냈다. 카메라는 멕시코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줬지만 정부는 사실 왜곡이라며 반박했다. 이제 그 나프타는 17년이 되었다. 10년째였던 2004년에는 전 세계적으로 논쟁이 벌어졌지만 15년째인 2009년에는 아무도 나프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미국이 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멕시코는 -7.1%의 경제성장율을 기록했다. 

정부의 광고대로라면 멕시코는 전 세계에서 가장 넓은 경제영토를 가진 나라이다. 미국과 EU 등 “거대 선진경제권과 동시다발적” FTA를 맺었으니 대한민국 정부가 애면글면 추구하는 “FTA의 허브”다. 과연 1993년에서 2007년까지 멕시코의 수출은 311%(석유를 빼면 283%) 증가했고 외국인 직접투자 역시 3배나 늘었다. 그러나 같은 기간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은 연평균 1.6%에 불과했고(2000년에서 2009년까지 0.9%) 무역수지는 지속적으로 적자였다. 이 기간이 미국 사상 최장의 호황기였는데도 그랬다. 급기야 2008년 멕시코는 대기업의 외채를 갚느라 외환보유고의 1/3을 써야 했고 IMF와 미국으로부터 긴급 달러 수혈을 약속받아야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미국과 인접한 마킬라도라 등에 자동차, 전자분야 초국적기업이 너도 나도 투자를 했고 거의 전량 미국으로 수출했다. 그러나 멕시코의 전체 투자율은 2000년까지 미미하게 증가하다 이제는 오히려 20% 부근에서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FTA로 인한 대대적 구조조정으로 멕시코 국내 제조업, 특히 부품산업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옥수수농업은 말 그대로 궤멸했다. 이에 따라 실질임금과 고용은 여전히 1990년대 중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긴급 수입한 쌀 한 봉지를 들고 있는 필리핀의 소년(왼쪽)과
                                            북미 자유무역협정(NAFTA)에 반대해 시위를 벌이는 멕시코 농민.

1960년대에 지어진 멕시코 인류학 박물관에 가면 그 수많은 부족마다 아주 다양하고 기막힌 옥수수 문양을 뽐낸다. 그러나 이제 옥수수의 원조 멕시코가 미국의 유전자 조작 옥수수로부터 토종 옥수수를 보존해야 하는 절박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유로이 날아 다니는 벌과 나비를 무슨 수로 막으랴.

멕시코 국내 은행들은 민영화를 거쳐 미국과 스페인 은행에 인수합병됐다. 1997년 2%에 불과했던 외국인 소유 은행 자산은 이제 83%에 이르렀다. 한국 정부의 소원대로 선진 금융기법이 도입됐지만 부자 도시만 혜택을 누렸을 뿐 중소기업과 서민에 대한 대출은 오히려 줄었다. 민영화한 멕시코의 공기업들은 너도 나도 값싼 달러를 빌렸고 당연한 것처럼 파생상품에도 손을 댔다. 2008년 리만 브라더스 파산 이후 외국 은행들은 달러를 본국으로 보냈고 멕시코는 한국의 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동시에 맞은 상황에 빠졌다.

5년 전에도 그랬듯 이제 정부는 멕시코와 한국은 다르다고 할 것이다. 물론 다르다. 그렇다면 미국을 능가하는 자원부국이고 유럽형 복지국가를 갖추고 있던 캐나다는 어떨까? 다행히도 캐나다는 멕시코와 같은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다. 캐나다 은행은 왕립은행(chartered bank)의 전통에 따라 자본을 도매시장이 아닌 예금으로 조달했으며 그림자금융 등 위험감수행위를 하지 않았고 정부의 자본규제도 바젤II보다 더 강했다. 즉 캐나다의 금융부문 만큼은 NAFTA의 민영화, 규제완화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것이다.

러나 나프타 이후 캐나다의 1인당 경제성장율은 1.2%(2000년에서 2009년까지는 1.1%)에 머물렀다. 실질임금은 1996년에서 2006년까지 10년 동안 4% 늘어났을 뿐이며 제조업 고용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아메리카의 복지국가 캐나다의 소득불평등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2008년 지니계수가 한국을 추월했다. 나프타 이후 캐나다의 공공사회지출/GDP 비율이 5%p 가량 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실업급여의 축소가 두드러졌다. 캐나다도 점점 미국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OEDC 국가 중 멕시코가 나쁜 쪽으로 부동의 1위, 미국이 4위, 그리고 캐나다는 13위를 차지했다(한국은 14위).

미국과 멕시코의 생산성 격차는 줄어 들지 않았고 캐나다의 경우 2000년 이후엔 격차가 오히려 확대됐다. 한국 정부는 한미 FTA를 맺으면 1%의 생산성이 향상돼서 경제성장율이 5% 가량 추가로 증가할 것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그런 신비스러운 일은 캐나다와 멕시코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프타는 두 나라에게 초헌법, 또는 외부헌법의 역할을 했다. 이 헌법은 민영화와 규제완화를 지시하고 있다. 국가 내부에서 이런 정책기조를 강력하게 추진하면 추진할수록 이 헌법은 위력을 발휘한다. 투자자국가제소권은 강력한 무기이다. 2010년 7월까지 알려진 NAFTA 투자자국가제소 총 76건 중 환경보호 16건, 자연자원 15건, 건강 및 식품 7건, 부동산 6건, 조세 2건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한국 정부의 주장과 달리 환경과 공공정책에 대한 예외조항이 얼마든지 무력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미 FTA는 복지 및 환경 정책의 강화를 가로막고, 줄어든 공공영역에 미국인 투자가 들어가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져도 되돌릴 수 없도록 하는 장치를 나프타보다 더 강력하게 갖추고 있다.

물론 상대국의 기존 경제사회구조, 정부 규제나 복지에 대한 내부의 합의 정도에 따라 미국식 FTA의 영향은 서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과연 한국의 지배계급은 캐나다형일까, 아니면 멕시코형일까? 어느 쪽이든 복지의 확대는 불가능하지만 멕시코형이라면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보면서도 자본시장통합법, 의료채권법을 추진하는 한국 정부와 재벌이 이미 그 답을 알려주고 있다.

멕시코는 '허브'(중심)가 아니라 자신보다 강한 상대국의 수탈을 받는 ‘스포크’(spoke, 자전거 살)였다. FTA 전문 연구자 볼드윈은 멕시코가 “스포크 함정(spoke trap)"에 빠졌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2009년 논문에서 그는 한국이 제2의 멕시코가 될 것으로 예언했다. 우리 스스로 왜 그래야 하는가? 국회는 비준하기 전에 이 질문에 대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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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번 주 이코노미 인사이트(한겨레신문사)에 실릴 글의 원본입니다.

 
아Q정전

- “김현종, 한미FTA를 말하다” 서평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책장을 넘기면서 누군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50쪽 쯤 읽었을 때 그 이름이 떠올랐다. 바로 루쉰의 “아Q"다. 김현종 전 본부장께서도(이하 존칭 생략) 어렸을 때부터 외국에서 생활하느라 혹시 불멸의 고전, ”아Q정전“을 아직 못 읽었다면 꼭 보시기 바란다.

                                                          

아직도 멕시코가 그리도 자랑스러운가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돌려 버렸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때린 다음에는 기분이 가라앉아 때린 것은 자기고 맞은 것은 다른 사람같은 기분이 되었다”(아Q정전)

김현종은 여전히 멕시코가 자랑스럽다. “보도내용과 달리 멕시코는 나프타 발효후 5년간 연평균 3.0%, 10년간 연평균 3.3%의 건실한 GDP 성장을 기록했으며, NAFTA를 계기로 중남미 제1위의 해외직접투자 유치국으로 부상했다”(120쪽). 수출이 증가하고 FDI가 대폭 유입된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1993년에서 2007년까지 수출은 311% 증가했고 외국인투자 역시 세배로 증가했다. 그러나 1인당 경제성장율은 15년간 연평균 1.6%에 불과했다. 도대체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성과인가? KIEP의 CGE 모델처럼 미국과 FTA를 맺으면 생산성이 1% 올라서 성장률은 6-7%를 넘어야 말이 되지 않겠는가? 그의 표현대로 “FTA 후진국”인 아시아 나라들은 물론, 미국과 FTA를 맺지 않고 비정통적인 경제정책을 사용하는 브라질보다도 훨씬 낮은 수치이다.

그 이후는 더 비참하다. 금융위기 이후 2008년의 GDP는 1.3%, 09년에는 -7.1%를 기록했다. NAFTA의 목적대로 금융시장을 개방하고 주요 공기업을 민영화했으며, 이들 기업이 외부 자본시장에 의존하고 심지어 파생상품을 다뤘기 때문이다(기업의 금융화). 멕시코 은행을 인수한 미국 대형은행들은 자국이 위기를 맺자 달러를 회수했고 멕시코는 외환위기 상태에 빠졌다. 이웃 나라 아르헨티나가 2001년 금융위기 때 자본통제 조치를 취했다가 2009년까지 47건의 투자자국가제소를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멕시코 정부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그가 한 챕터를 할애해 아무 문제도 없다고 곳곳에서 강변하는 투자가국가제소권의 실체이다. 불행하게도 멕시코는 구조적 위기 상태에 빠져서 약간의 외부 충격에도 국민의 삶은 위협받게 되었다.

내부의 양극화도 더욱 심해졌다. 06년 현재 실질임금은 아직도 96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지니계수는 0.47 정도로 OECD 국가 중 부동의 1위이다. 그런데도 그는 “나프타가 멕시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정부가 효과적으로 반박했기 때문인지 관심이 캐나다로 바뀌었다”(158쪽)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당한 복지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던 캐나다도 NAFTA 이후 미국을 따라 공공지출을 줄인 결과 한국보다도 지니계수가 높은 나라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보다 15년에서 20년(캐나다) 앞서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들의 현재 상태이다.

김현종에게 멕시코는 또 다른 면에서도 모범이다. 세계에서 제일 많은 나라와 FTA를 맺어서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전 세계 시장을 대부분 ‘선점’했기 때문이다. 바로 김현종의 꿈인 “FTA의 허브”이다. 그러나 냉정한 경제학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양자간 협정에서 언제나 허브는 강대국이 되기 마련이다. FTA 전문 경제학자인 볼드윈은 이를 스포크 함정(spoke trap)이라는 말로, 즉 여러 강대국에게 이리 저리 휘둘리게 되는 현상으로 묘사한다. 불행히도 그 볼드윈은 한국이 멕시코 꼴이라고 예언했다.


제갈공명, 손오공, 아Q

이 책에 따르면 그는 거의 제갈공명이다. 미국의 협상가들은 언제나 그의 실력과 꾀에 당하고 만다. 그에 따르면 “(의약품 분야에서) 미국 측이 세부 이슈에 대한 요구를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역대표부의 고위급은 물론 분과장마저도 포지티브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거 같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한국과 FTA 협상을 하기 직전인 2005년에 체결한 호주-미국 FTA(AUSFTA)의 핵심 쟁점이 바로 바로 이 포지티브리스트에 의한 약값 산정 방식(PBS)이었다. 고작 1년 후 한미 FTA 협상이 되자 USTR(미국무역협상대표부)이 그들의 골머리를 싸매게 만들었던 PBS를 까맣게 잊어버렸다는 것일까?

기실 약값 적정화 방안의 포지티브 리스트가 뭘 의미하는지 몰랐던 건 김현종 자신이었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협상이 시작된 후에야 “협상 전에 미국이 이른바 4대 현안 중 하나로 새로운 약가제도 도입 자체를 요구한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퍼즐 조각이 비로소 맞추어진 느낌이었다”(127쪽). 이런 사람이 우리 협상을 지휘한 것이다.

한미 FTA가 체결된 날 미국 제약업계는 대대적인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그는의약품에서 양보한 것이 없다고 한다. 도대체 누가 당한 것일까? 무역구제 분야의 비합산조치처럼 한국 기업들의 숙원이지만 전혀 관철시키지 못한 이슈는 그가 단지 전략적 미끼로 썼기 때문이란다. 맞았는데 오히려 때렸다고 생각한다. 어디서 많이 본 광경이 아닌가?

그에겐 “경쟁적 자유화"라는 미국의 FTA 전략을 고안한 죌릭도 한수 아래로 보였다. ”미국시장을 선점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 자체가 죌릭이 고안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가 알 리 없다. ”김현종을 만났을 때 죌릭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동북아에서 미국 주도의 세계체제에 중국을 순응하게 만들 대리인,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노는 손오공이 거기 있었다.“(정태인, 시사저널, 2006. 4) 아Q는 자신이 손오공처럼 신출귀몰하다고 상상한다.


개성공단과 한일 FTA

그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통상교섭본부를 확 바꿔 놓은 인물로 자신을 되풀이해서 묘사한다. 그 중에서도 개성공단을 FTA에 포함시킨 아이디어가 대표적인 보기로 생각하는지 책 곳곳에 개성공단이 등장한다. 그는 2004년 11월 아펙 정상회담 때 대통령에게 한-싱가포르 FTA에 개성공단을 포함시키겠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이 흐뭇해 한다. “FTA에서 그런 것도 다룹니까? 개성공단 인정 받으면 거 참 좋겠네”(48-49쪽).

그런데 그는 이미 2004년 6월에 한일 FTA에 관한 보고를 할 때 이미 “개성공단 제조상품의 한국산 인정”을 관철시키지 못하면 한일FTA를 중단시키겠다고 말했다(324쪽). 대통령이 건망증이 있었나? 참 시시콜콜한 걸 다 꼬집는다고 할이지 모르지만 김현종에게 싱가포르와의 FTA에 개성공단을 집어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건 바로 나였다. 또한 서해안 프로젝트 때문에 자주 만나던 싱가포르 대사에게 이 얘기를 강조한 것도 나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을 뿐이다.

반면 나는 한미 FTA에서 개성공단을 아예 꺼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 환경, 심지어 핵문제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개성공단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결론난 한미 FTA는 앞으로 다른 나라와의 협상에도 계속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개성공단이 자랑거리이다. 아Q가 따로 없다.

주지하다시피 김현종은 한일 FTA를 중단시켰다. “졸속 FTA를 타결하게 된다면.. 제2의 한일합방이 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309쪽) 그는 대통령 보고서에서 “부품소재...를 집중 보호해야 하며 자동차, 기계, 정밀화학도 경쟁력이 약해 보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309쪽) 한편 그는 한미 FTA 때 엽계의 우려를 전달하러 온 화장품업 대표에게 실망한다. “(관세혜택으로) 일종의 ‘국민보조금’을 준 셈이었다... 그런 대기업의 간부가... 관세철폐가 되면 도태된다고 하는 것은 국민을 배신하는 일이다”(178쪽)

그러나 화장품은 그가 한일 FTA 때 걱정한 정밀화학의 대표적 상품이고, 정밀화학은 정밀기계와 함께 한미 FTA에서 가장 타격을 받을 제조업 분야이다. 일반적으로 봐도 제조업의 물적 생산성은 일본이 미국의 약 80% 정도이고 한국은 기껏 40% 가량에 머무른다. 그런데도 일본에 대해서는 보호를 해야 하고 더 강한 미국에 대해서는 개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현종은 대통령이 자신의 이런 모순적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대통령은 2005년 2월 1일 “많은 보고가 있었지만 믿지 못하겠다. 정비서관이 한일 FTA를 검토해서 보고하라”고 나에게 지시했다. 그 해 5월에 내가 잘렸지만 나 없이 완성된 한일 FTA 보고서는 2006년 3월, 한미 FTA 반대 보고서와 함께 대통령에게 전해졌다.

한미 FTA 비판자를 쇄국론자로 몰아 붙이는 그가 왜 한일 FTA가 되면 ‘제2의 한일합방’이 된다는 극단적 상상을 하는 걸까? “노대통령은...선진 시스템을 갖춘 국가와 FTA를 체결해 우리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59쪽). 그 역시 한미 FTA 청와대 브리핑 제1호에서 “한미 FTA는 낡은 일본식 법과 제도를 버리고 미국의 글로벌 스탠다드를 받아 들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뿔싸, 그 선진시스템이 붕괴한 것이 작금의 글로벌 금융위기이다.

아Q는 자신의 무지와 허세 때문에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한국의 아Q는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래도 이 책을 보시려거든 먼저 아Q 정전을 읽는 게 낫겠다. 무려 500쪽에 달하는 이 책에 비해 아Q정전은 50쪽도 되지 않는다.


Posted by mojiry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에 실릴 글입니다. "미친놈과 바보의 싸움"의  증보판입니다.


역사로서의 현재

“역사로서의 현재”는 미국의 정치경제학자 스위지가 1950년대 초에 발간한 평론집의 제목이다. 유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현재의 위치를 파악하겠다는 이 도저한 문제의식은 범인이 잘못 사용하면 치명적인 칼날이 될 수도 있다. 엉뚱한 역사적 시점에 현재를 대입할 수도 있고, 위치를 제대로 찾았다 하더라도 상황의 차이를 간과해서 시대착오적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고성장에 놀라서 한반도의 현재를 구한말에 대입하고 한미 FTA를 추진하면서 엉뚱하게도 이를 “원교근공”이라는 봉건 시대 전략으로 합리화한 참여정부가 바로 그렇다.

(박민규기자)



현재 세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사건은 2008년 가을 이래, 이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된 대침체(Great Recession)이다. 미국의 법과 제도를 이식하여 한국을 서비스 전문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미국과의 경제동맹을 강화하여 중국을 견제하려던 고 노무현 대통령이 미국발 금융위기가 발발하자 한미 FTA 재협상까지 시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중국과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리라던 미래학자들의 예언은 이제 현실이 되었다.

“기존 패권은 무너지고 있지만 신흥 패권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상태, 신자유주의는 무너졌지만 새로운 축적의 원리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 미국은 어떤 선택을 할까? 아마도 1980년대 중반의 플라자협정, 그리고 미일반도체협정을 떠올리며 만만한 나라에 비용을 치르게 하는 단기 해법을 들고 나올 것이다. 다만 이제 그 상대가 일본이 아니라 중국이라는 사실이 미국의 고민일 테고 훨씬 만만한 상대로 한국이 자동차 등에서 먼저 시험대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목숨을 건 환율전쟁, 금리전쟁, 통상마찰., 심지어 군사적 전쟁.. 그 한 복판에 한반도가 있다”(정태인, 경향신문, 2009. 1.12).


치킨게임과 안보 딜레마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한 것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미친 짓’이다. 그리고 뒤이어 한국이 서해와 동해에서 무력시위용 군사훈련을 한 것도 마찬가지로 ‘미친 짓’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미친 짓이 더 나은 성과를 거둘 때도 있다. “치킨 게임”이라면 그렇다.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서 짐과 버즈는 주디 앞에서 자신의 용감을 증명하기 위해 절벽을 향해 나란히 질주한다. 아이들에게 그 짓이 얼마나 절박한지 몰라도 어른, 또는 제3자가 보면 분명 미친 짓이다. 만일 똑같은 조건이라면 잃을 게 많은 쪽이 먼저 핸들을 틀 것이다. 미친 짓에 대한 외면이 이 게임의 균형해이다.




따라서 이기려면 진짜 미친 놈이 되거나 상대방이 “저 미친 놈”이라고 혀를 내두르도록 해야 한다. 실제로 냉전시대의 핵무기 경쟁 때 닉슨은 “미친 놈”이라고 욕을 먹자 “미친 놈으로 보이도록 하는 게 내 전략”이라고 대답했다. 군비 경쟁, 나아가서 무력 경쟁을 한다면 거의 100% 한국이 이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잃을 것이 많다. 전쟁 개시와 함께 발사된 북한의 포탄에 서울 인구 100만명 정도는 희생될 것이다. 북한이 초토화되고 김정일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이것은 이긴 게임이 아니다. 설령 중국이 참전하지 않는다 해도 그렇다. 이런 게임을 만들어 놓았다면 당연히 ‘미친 놈’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 지금 조중동 등 수구언론의 주장이 그러하다.

사춘기 철부지 정도의 정신연령에 머물러 있는 조중동이야 그렇다 쳐도 설마 한 나라를 운영하는 집단이 이런 게임을 유도했을까?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표방한 대북정책의 지침은 ‘상호주의의 원칙’이다. 그렇다면 원래 이들의 대북정책은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 기초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정말 그랬을지는 의심스럽지만).

악셀로드의 유명한 실험이 증명했듯이 이 게임에서 최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이다. 상대방이 직전에 한 행동을 따라 해야 이 게임에서 승리한다. 아니 정확히 얘기해서 이긴다기보다 지지 않는다. 일단 선의(협력)로 시작하고 상대방이 배반하면 우리도 배반(협력의 중지 또는 무력경쟁)하는 것이다. 단 배반과 대결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 즉 양쪽 다 패자가 되는 걸 막기 위해선 어느 순간 다시 협력을 선택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전술의 반전은 여유 있는 쪽에서 결행할 것이다. 지속적 대결에서 잃을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동안 정부여당은 “선에는 선”을 잊어버린 듯 오로지 배반을 선택했다. 이제 협력으로 얻을 게 별로 없는 북한은 ‘미친 짓’을 선택한다. 북한은 현재의 상황을 치킨 게임으로 인식한 것이다. ‘미친 짓’ 중 가장 비용이 적은 선택이 핵개발이다. 연평도 포격은 ‘미친 짓’ 좀 봐달라는 ‘미친 짓’이다. 우리 정부의 대규모 군사훈련은 북한이 파국을 선택할 수준 바로 밑까지 나아간 ‘미친 짓’이다. 물론 전쟁의 역사가 말해 주듯 예기치 못한 어떤 사태에 의해 둘 다 ‘미친 짓’을 선택하는 파국으로 나아갈 지는 알 수 없다.

죄수의 딜레마보다 더 나은 것이 사슴사냥게임(Stag-Hunt game, 또는 Assuarance game)이다. 이 경우는 협력에서 얻는 이익이 더 크기 때문에 한번 좋은 균형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배반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렇게 게임을 설계해서 양쪽 모두 배반할 이유가 없는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 대북정책의 뼈대가 그러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저비스(R. Jervis)는 저 유명한 "안보 딜레마 하에서의 협력“이라는 논문에서 국제정치란 안보딜레마 등의 제약이 걸린 사슴사냥게임이라고 갈파했다.

불행하게도 현재 남북은 정확히 안보 딜레마에 빠졌다. 월러스틴이 “남한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될 것”이라는 음울한 예측을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핵은 이제 일반 국민들에게도 공격용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날치기로 통과 시킨 내년 예산 중 안보.외교분야는 9% 증가했다(작년에는 0.4% 증가). 보수주의자들 속에서 그래도 합리적이라던 박세일교수도 북한붕괴를 입에 올렸다. 가히 악무한의 집단 광증이다.


미중 대립과 한반도 상황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국제상황은 ‘미친 짓’의 전제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작년의 서울 G20에서 현실로 드러났듯이 미국과 중국은 만만치 않은 기세로 경쟁하고 또 대결할 것이다. G2의 이 대립은, 우리가 어떤 게임을 선택한다 해도 그 뒤에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절대적 환경이다.

세계경제의 혼란은 중국에게도 크나 큰 도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가 택할 길은 현재의 지나친 대외의존도를 줄이고 거품의 김을 빼서 가능한 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이다. 지난 12월 5일 공산당 중앙위 제17기 5차 전체회의에서 채택한 “국민경제와 사회발전을 위한 제12차 5개년 규획(規劃)”은 이런 사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중국의 동북부를 발전시키려는 “동북진흥계획” 역시 북한의 안정을 전제로 할 수 밖에 없다. 북한의 배반을 응징하기 위해 봉쇄정책이나 군비경쟁을 강화한다 해도 이런 중국이 존재하는 한 별 효과가 없다.

미국 사정은 훨씬 더 어렵다. 내부 개혁으로 위기를 돌파하려던 오바마 대통령의 시도는 좌절됐다. 내부의 합의를 끌어내지 못하는 정권이 항용 그러하듯 오바마 정권은 칼끝을 외부로 돌렸다. 수출을 50% 증가시키기 위해 통화 증발(양적 완화 2)을 단행하고 심지어 “공정무역을 위한 통화개혁법”이라는 지극히 보호주의적인 법안까지 통과시켰다.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에서 간단하게 일본을 제압하는 등 예상을 넘어서는 중국의 급부상은 미국의 아시아 개입을 강요하고 있다. 별 여력이 없는 미국이 택할 길은 ‘동맹국’의 일방적 희생일 수 밖에 없다.


딜레마에서 빠져 나오기 - 협력게임과 안보공동체

이런 상황에서 반복되는 치킨 게임은 남북 모두를 악화시킬 뿐이다. 북한은 3대 세습에, 그리고 남한은 정권 유지에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을 뿐, 단기 실리 면에서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전략이다. 60년대 중소의 대립 속에서도 ‘주체’ 외교의 길을 걸었던 북한은 이제 일방적으로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예컨대 중국과 러시아의 경쟁을 이용하여 최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던 나진 선봉 지역의 개방이 그러하다.

한국은 천안함, 연평도, 한미 FTA로 이어지는 연쇄 속에서 일관되게 ‘대미 퍼주기’에 골몰하고 있다. 안보 딜레마는 미국 무기 수입의 급증을 초래할 것이다. 남북 양쪽이 찢어져서 미중의 앞잡이 노릇을 계속한다면 경제적 실리를 넘겨 주는 것을 넘어서 최악의 경우 민족적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때는 더더욱 협력 게임이 유리하다. 논리적으로는 간단하다. 협력의 이익이 배반의 이익보다 커야 하고(햇볕정책의 핵심이 이것이다) 수비 전략이 공세 전략보다 유리하도록 판을 짜야 한다. 게임의 환경을 이루는 미중 대립 속에서 어느 한 쪽 편을 들어서는 안된다. 미중 모두에게도 사슴사냥게임의 협력해가 최선의 해법이며 장차 안보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안보딜레마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은 한반도 전체가 평화지대, 적어도 중립지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북 양쪽의 지배세력의 단기 이익 추구 때문에 현재의 위기가 초래됐을 뿐이다. 행여 북한의 3대 세습을 들어 북한 지배세력의 한계를 예단해서는 안된다. 지난 60여년의 외교사를 보면 북한정권이 정확히 게임이론의 논리에 따라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협력의 이익이 크다는 것, 즉 미국이 북한을 공격해서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남한과의 지속적 경제협력이 최고의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기만 한다면, 즉 북한이 치킨 게임으로 현실을 인식하지 않도록 만든다면, 현재의 경제력이나 군사력 격차에 비춰 볼 때 북한이 협력해를 택할 가능성은 매우 높다.

앞에서는 논리로 얘기했지만 현실적으로도 남북간 게임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것은 남한이다. 문제는 정권의 단기 이익과 대기업의 단기 이익이 버무려져 탄생한 근시안이다. 일반 국민 뿐 아니라 자본 전체의 장기 이익은 명확히 평화와 협력에 있다. 물론 한반도 만으로 더 큰 틀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우리 주변의 모든 나라는 중국의 패권도, 미국의 패권도 원하지 않는다. 아세안은 물론 러시아나 일본도 그렇다.

양대 강국이 한반도의 영구평화를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들 나라와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사업을(예컨대 환경문제의 해결, 공동의 정보 인프라 구축, 유라시아 철도 건설 등) 진척시키면서 이런 합의를 강화해 나가는 것, 나아가서 아시아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결코 꿈이 아니다.


Posted by moji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