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이번 달, 그리고 내달 작은책에 실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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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깨어있는 시민”이 못 될까 - 고 노무현대통령께 드리는 글

 

정태인(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우리들의 행동방식과 “88만원 세대”

 

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행동경제학이다. 이 생각의 흐름 밑바닥에는 방법론적 개인주의(개인이 어떻게 행동할까)가 있다. 그리고 난 맑스주의, 즉 구조주의와 역사주의로 훈련된 사람이다. 물과 기름처럼 도저히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두 방법론이 내 안에서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박현채선생의 말씀, “진보란 민중의 삶이 나아지는 것”이라는 궁극의 목표가 이 불편한 공존에 대한 내 나름의 변명이다. 결국 실용인 셈인데, 멋진 이론의 틀을 만드는 게 아니라(어찌 사적 유물론이나 일반균형론과 같은 아름다운 그림을 또 다시 만들 수 있으랴) ‘민중의 정책’을 만드는 게 내가 살 이유라면 그리 머리 싸매고 고민할 일도 아니다. 어중이 떠중이로 시작했다가 바로 여기서 실패(^^)한 프로젝트, “사랑의 경제학”(협력하는 경제, 따뜻한 경제는 가능한가?)도 실은 그런 욕심의 결과였다. 이제 구조와 개인을 어설프게나마 만나게 할 때가 되었다.

 

우리 현실에서 가장 분명하면서도 해명하기 힘든 현상이 이른바 “88만원 세대”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현상의 뿌리에는 “세대간 착취”가 도사리고 있다. 내 자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게 결국 다음 세대 대부분을 착취하는 걸로 귀결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기성 세대가 최선을 다한 결과가 결국 우리 아이들 세대 전체를 착취하고 있는 거라면 그 얼마나 끔찍한가? 불행하게도 그것이 실제 상황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웬만해서 빠져 나갈 수 없는 미로에 “죄수의 딜레마”라는 게 있다. 혹시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을 때, 자문해봐야 할 질문은 이렇다. “남이 다 하면 나도 따라 할 수 밖에 없다”(공포), 그리고 “남이 다 안 하는 경우 나만 하면 ‘대박’이다”(탐욕). 이 두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를테면 리트머스 시험지이다.

 

바로 사교육이 그렇다. 그리고 부동산(주식)에 대한 우리 태도도 비슷하다. 남들이 다 과외시키는데 우리 애만 마냥 놔둘 수 없고, 남들이 다 빚내서 집사는데 나만 유유자적, 안빈낙도 하다간 영원히 셋방살이 신세일 거 같고, 반대로 남들이 다 안 한다면 어디 값싸고 좋은 과외선생이나 잘 나갈 땅이 없나, 기웃거리는 우리는 바로 그 함정에 빠진 것이다. 모름지기 투기란 죄수의 딜레마가 위력을 발휘하는 게임이다.

 

그런 투기의 결과로 사교육과 부동산 가격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래서 이 게임은 아주 희귀한 예외를 빼곤 백이면 백 부자들이 이긴다. 때론 지배계급이 처음부터 그런 게임을 설계할 수 있다.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대표였던 졸릭(Zollick, 지금은 세계은행 부총재)의 “경쟁적 자유화”는 바로 이 죄수의 딜레마를 응용한 것이었고 김현종은 부처님 손바닥안의 손오공처럼 한미 FTA를 추진했다(“남들이 안 하면 미국 시장을 선점”해야 하고 “남들 다하는 데 우리만 FTA 후진국일 수 없다”는 정부의 논리를 상기해 보라).

 

집값과 땅값이 하늘로 치솟고 과외비에 허리가 휜다. 보릿고개가 사라진지 이미 오랜데, 우리 아이들이 더 절망적인 건 실제론 대부분 이길 가망이 없는 게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내 아이만은 그런 함정을 신묘하게 비켜 나갈 것이고 그러면 ‘대박’이라는 황당무계한 낙관이, 아무리 밤을 새 일해도 집을 살 수 없고 ‘신의 직장’에만 목을 매는 상황을 만들었다.

 

이건 분명히 “세대간 착취”다. 우리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누려야 할 자연을 파괴하는 “4대강 사업”만 미래를 착취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말하자면 이명박대통령만 욕할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근시안적 경쟁이 끝없이 끌어 올리고 있는 집값을 아이들이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단 1점에 목을 매게 하는 입시의 가격은 또 어떤가.

 

우리 모두 스스로 매일 한 삽씩 절망의 늪을 파면서 내 아이만은 늪 밖에서 승리의 열매를 맛볼 수 있을 거라는 터무니없는 낙관이 결국 우리 아이들을 착취하고 있다. 진단이 이렇다면 답도 간단하다. 게임이론으로 말하자면 ‘죄수의 딜레마’를 ‘사슴사냥게임’으로 만들면 되는 것이고 현실로 말하자면 지금의 무한경쟁에서 다 같이 빠져 나오자고 합의하면 된다. ‘사교육 금지’, ‘부동산 투기 금지’에 마음을 모을 때만 비로소 이 게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 홀로 그럴 수 없다는 이유로 지는 게임을 계속한다면 우리 아이들은 말 그대로 “88만원 세대”일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투기의 미몽에서 얼마간 벗어난 지난 지방선거와 재보선은 우리 스스로 비춘 한줄기 빛이다. 물론 빛이 보였다고 해서 출구가 열리는 건 아니다.

 

거시정책과 투기

 

같은 사안을 놓고 보수는 개인을 탓하고 진보는 사회적 구조를 들이댄다. 이 기준에 비춰 본다면 위에서 나는 지금 보수주의적(!) 입장에서 문제를 진단한 것이다. 개인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게임이론의 틀로 설명하면 스스로 갑갑해진다. 우리 모두 각성하면(“깨어 있는 시민”만 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란 사실도 현실에서 실천하기론 지난하기 이를 데 없다. 모든 개인은 사회 속에 존재하고 게임의 구조가 그런 사회를 직접 설명해주는 건 아니다(20여년 전 처음 게임이론을 만났을 때 나는 후배에게 “역사는 게임이 아니”라고 자못 단호하게 진단했다).

 

진보건 보수건 재벌들의 수출이 줄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질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수출이 늘어야 성장률이 높아지고 그래야 88만원 세대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보수주의의 가설을 누구나 얼마간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집단 사고(경로의존적 사고, 또는 현상유지 편향)는 어떤 결과를 낳을까.

 

우리의 거시지표가 그 결과이다. 미국이 작년에 6천억 달러 규모의 제2차 양적 완화(통화증발)을 하고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를 향해서 노골적으로 통화절상 압력을 가해도 원화는 꿋꿋하게 고환율을 유지했다. 거의 모든 주요국의 통화 가치가 올라간 가운데 대달러 원화 가치는 2007년말 대비 여전히 20% 정도(실질로는 17% 가량) 낮아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갈 곳 없는 세계의 돈이 아시아의 주식시장과 채권시장으로 몰려 들었는데도 환율이 그 상태를 유지했다는 건 한국은행이 달러당 1100원 선에서 무제한으로 달러를 사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그 액수만큼 시중에 원화가 풀린다. 물가안정이 지상의 목표인 한은은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해서 그 돈을 거의 다 거둬들였다(이른바 불태화 정책인데 1997년 외환위기의 교훈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다). 상대적으로 값싸진 우리 물건은 수출이 잘 될 것이다. 도요타의 리콜사태부터 최근의 지진까지 일본의 불행 역시 여기에 일조를 했다.

 

한편 국채(통안증권)를 사들인 은행들은 자산이 증가했으므로 대출을 늘릴 여력이 생겼다. 그러나 떼어먹힐 걱정이 거의 없는 안전한 대기업들은 수출로 벌어들인 돈이 흘러넘친다. 우리 기업의 90% 이상의 숫자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투자할 여력도 없고, 투자해봤자 하청단가 인하로 생산성 향상분을 고스란히 빼앗긴다. 그 결과가 시도 때도 없이 휴대전화에 뜨는 ‘값싼 대출’ 메시지이다. 넘쳐나는 돈을 가계에 빌려 줘야 은행이 살 수(평균 수익률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로 더 없이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는 지금도 신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홈페이지에 “물가안정- 한국은행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입니다”라고 내건 한은이 물가가 4%를 넘나드는 데도 금리를 사실상 동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외적으로 금리를 올리면 환율 관리가 더 어려워진다는 점도 있을 테지만 국내에 부동산 거품이라는 시한폭탄이 또아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기실 이런 거시정책은 이명박 정부만 추구한 것이 아니다. 2000년대는 세계적 부동산 붐이 있었고 우리 사회에선 더욱 더 그랬다. 우리는 이런 구조 속에서 위에서 말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사회의 위쪽으로 돈이 몰리게 하는 환율과 금리 정책이 낳은 통화 홍수를 부동산과 주식 투기가 흡수하는 구조였다. 대세에 뒤처지면 안된다는 공포와 나만은 대박을 칠 거라는 탐욕이 우리 스스로 그런 구조를 용인하고, 나아가서 부추겼다.

 

그러나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한국 부자들의 “땅짚고 헤엄치기”도 위협했다. 거품이 낄대로 낀 부동산 시장이 돈을 흡수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대세 하락기”란 이런 심리를 표현한다. 투기의 정신적 고향인 월스트리트가 초토화하는 걸 보면서도 투기에 목을 맬 만큼 우리의 심장이 튼튼하지는 않다. 하여 보수주의적 주류경제학의 공적 1호인 인플레이션이 현실이 되고 있는데도 한국은행이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그래서 간단하다. 부동산 거품의 파국을 임기가 끝날 때까지 막아야 한다. 공급 쪽에서 파산의 위기에 빠진 건설회사에 일단 대출을 연장해주고(이른바 “대주단 협약”) 나아가서 일감을 마련해 줘야 하니 4대강 사업이 절실하다. 한편 팔리지 않을 건설투자에 돈을 댄 금융회사도 망하면 안된다. 부실화한 저축은행의 목숨을 어떻게든 부지시켜야 하니 온갖 편법이 다 등장하고 있다(은행들의 ‘자발적’ 민간 구제금융). 나아가서 지난 정부가 채워 놓은 부동산 투기 억제 온갖 차꼬도 다 풀어야 한다. “내가 해 봐서 다 아는” 대통령의 경험이 위력을 발휘하게 된 이유이다.

 

사회구조와 우리들의 행동

 

이명박정부 경제정책은 어떤 결과를 낳을까? 대기업 수출의 증가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그래야 우리의 삶이 낳아질 거라는 주장은 이미 15년 전 경부터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상류의 저수지가 가득 채워지면 그 물이 아래로 흘러넘쳐 우리 모두 행복해질 거라는. 이른바 적하효과(trickle down effect)는 없어진지 오래다. 투기라는 메커니즘은, 4대강 사업이 스스로 내세운 것처럼 상류의 “물통을 더 빨리 키운다”. “부자 되세요”라는 낙관적 구호가 웅변한, 그리고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는 극단적 경쟁이 어우러진 투기경제(조금 우아하게 말한다면 “자산주도경제”)는 위에서 보았듯 그들의 물통을 늘리는 데 우리가 적극온 몸으로 일조하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혹시 돈이 넘쳐나서 문제가 된다면 외부로 빼돌리면 그만이다. 이미 글로벌 기업이 된 재벌들은, 하청 중소기업이 다 망한다 하더라도 중국이나 동남아에서 부품을 조달하면 되고 투기경제 속에서 개인적으로 살아 남기 위해서 대기업 노동자들 역시 한 배를 탔다. 노동계급의 연대란 상투화한지 이미 오래 된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일 뿐이다.

 

구조는 행위 패턴을 낳고 생존을 위해 매달린 그 행위가 다시 구조를 강화시킨다. 세계금융위기는 그 구조가 위기로 치달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 구조는 지난 30여년간 세계 전체에 새겨진 것이다. 케인스의 “소득재분배”(실제 케인스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지만)를 넘어서 “자산재분배”의 거시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능력 바깥에 있는 세계, 또는 지역적 위기의 재발에 대비해야 한다.

 

부동산이나 교육과 같은 자산의 가격이 서서히 떨어지도록 만들고 개별 경쟁으로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그 자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관리해야 한다. 경제학이 새삼스럽게 지난 50년간 호들갑을 떤 ‘공유지의 비극’을 인류는 항상 극복해 왔다. 가장 추상적인 수준에서 현재의 위기가 ‘보이지 않는 손’이 아예 없거나, 혹시 있더라도 기능부전에 빠졌기 때문(스티글리츠)이라면 해답도 간단하다. 인류 역사 상 우리가 절멸하지 않고 살아남게 했던 그 비결을 되살리면 된다. 경쟁이 아닌 협력이 그 답이다. 전 인류가 모두 걸려 든 “기후변화”와 같은 사회적 딜레마의 해결 방식도 똑같다. 물론 딜레마라는 말이 그대로 표현하듯 그 실천은 지극히 어렵지만 말이다.

 

너무 급작스레 현실로 돌아온 질문이지만, 앞으로 1년 6개월여 우리를 사로잡을 정치일정은 우리를 이런 해답 쪽으로 인도하고 있는 것일까? 박근혜씨야 그렇다치고 과연 현재의 야당연합은 이런 구조와 행위를 넘어서 희망의 세상으로 나아가게 할까? 지금까지 말한 위기의 구조를 초헌법으로 만드는 “거대경제권과의 FTA"에 찬성하면서 복지(재분배)로 희망을 만들겠다는 말을 믿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자기의 순수를 지키기에도 역부족이어서 오히려 현실 정치를 외면하고 있는 ‘리얼 진보’가 그 희망일까? 협력의 원리를 손에 잡히는 정책으로 구현하는 것이 보수와 진보를 넘어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되려면 눈부터 떠야 한다. 위기의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임금의 나체를 맨 눈으로 보고 ”임금이 벌거벗었다“고 말해야 한다. 구조를 바꾸기 위해선 행동을 해야하고 모두 행동에 나서도록 하기 위해선 구조를 조금씩이라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Posted by moji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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