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원리와 한계


(1) 시장과 민주주의(정치)


모든 교과서나 대중서가 그러하듯 시장의 원리에 초점을 맞춰 강의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경제는 시장이 아니다. 물론 시장부터 알아야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믿음처럼 시장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면 어찌 세상이 이리 팍팍할 것인가?


시장에서는 기본적으로 1원 1표의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시장에서 결코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이재용씨는 시장에서 나보다 몇만배의 힘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그가 나보다 몇만배의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정당화된다. 또 그 정당성은 거의 모두 그가 아버지를 잘 만났다는데서 비롯된다. 이런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가 과연 옳은 것일까?


반면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원리를 기본으로 삼는다. 이재용씨나 나나 투표함 앞에서는 똑같은 한표를 행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장과 민주주의가 동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건 미국 스스로 내세운 자신들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과연 평등할까?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따라 이재용씨가 언론사를 소유하게 되면(시장에서 돈으로 사면 된다!) 과연 민주주의에 내재해 있는 평등의 가치가 제대로 실현될까? 그게 위험하다고 판단한다면 뭔가 규제를 해야 한다. 시장과 민주주의는 마주 서서 긴장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지난 몇 달간의 촛불집회에서 나온 목소리가 바로 이것이다. 광우병 우려의 소, 교육 시장화, 의료민영화, 공기업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것은 시장이 민주주의를 훼손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정치, 즉 권력은 경제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친다. 민주주의나 독재 등 정치체제의 유형과 경제성과 간에 선형적인 관계를 설정하기는 어렵지만(예컨대 낮은 경제 발전 단계에서 독재는 경제성장(만이라면)을 촉진할 수 있다), 권력관계를 빼고 경제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2) 시장의 원리 


내가 경제학을 공부하면서 참 희한하게 생각했던 게 있는데 모든 교과서가 하나 같이 소비자 행동에 거의 반 가까운 지면을 할애한다는 것이다. 소비자의 선호에 관한 복잡한 가정, 예산선과 무차별곡선,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한계효용 균등의 원리 등등 온갖 개념이 여기에서 다 나온다. 그럴듯하지만 또한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들인데, 이 모두가 수요곡선이 매끄럽게 우하향한다는 걸 증명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공급곡선은 너무나 허망하게도 기업의 (단기) 비용곡선으로 간단하게 설명된다.


단언하지만 수학적 체계를 갖추다 보니 탄생한 이런 복잡한 개념들은 다 잊어도 된다(그러나 불행하게도 대학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다 알아야 한다). 어느 경제학자도 현실 경제를 생각할 때 이 복잡한 도출과정을 떠 올리지 않는다. 다만 우하향하는 수요곡선, 우상향하는 공급곡선, 그리고 두 곡선의 교차점만 알면 된다. 그리고 이 두 곡선의 존재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값이 비싸지면 덜 사려고 할 것이고(우하향하는 수요곡선) 반대로 생산자는 더 많이 팔려고 할 것이다(우상향하는 공급곡선). 그리고 두 곡선이 만나는 곳, 즉 수요와 공급이 맞아 떨어지는 곳에서 균형이 이뤄진다.


수요곡선은 효용극대화(인간은 오직 자기의 (물질적) 만족을 (이기적으로) 극대화한다)의 균형점을 표시하며 공급곡선은 이윤극대화(기업은 이윤을 극대화한다)의 균형점을 나타낸다. 그리고 둘 사이의 균형은 시장균형이 되며 그 때의 가격이 균형 가격이다.


모든 재화에 대해 이런 균형이 이뤄진다면 모든 사람은 (이기적 욕구를) 만족하게 될 것이다. 소비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만 하면 되고 생산자는 오로지 돈 벌기에 혈안이 되면 그만이다. 그야말로 '되고송'이다. 자기 욕심만 채우면 전 사회는 더 이상 나아질 수 없는, 최고의 상태로 행복해진다(파레토 균형). 이 얼마나 좋은가. 온통 눈에 밟히는 가난한 사람들, 사회 전체를 잊어도 된다. 아니 모두 잊고 자기 이익을 채우는데 일로매진해야 사회는 발전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다(물론 아담 스미스는 이렇게 천박하게 얘기하지 않았다. 그 이후 경제학자들이 그 쪽으로 몰아갔을 뿐).


시장이론의 힘은 막강하다. 적어도 인간의 본성 중에 이기심이라는 게 존재하면 시장이론은 현실에서 작용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나아가서 사회가 호모에코노미쿠스를 상정해서 구성된다면 인간의 다른 본성은 억압되며 시장이론은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질 것이다. 대공황직전까지 번성했던 자유주의, 그리고 1980년대의 신자유주의가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러나 시장이론만으로 사회를 조직하면 마르크스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라는 개념에 의해 논리적으로(물론 상쇄력이 언제나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역사적 경향’으로만 존재한다), 그리고 폴라니가 역사의 관찰 속에서 직관적으로 관찰한 대로 파국이 올 수 밖에 없다. 거칠게 얘기한다면 시장의 경쟁이 낳는 효율화는 언제나 자원을 절약한다. 그러나 그렇게 절약된 자원(노동, 자본)이 다른 곳에 고용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불균형에 빠지고 결국 폭발하게 될 것이다(시장은 극단적 가격변화에 의해 균형을 회복할 것이다). 


정치사회적으로는 더 심각하고(사회의 양극화와 불신의 고조), 이전의 경제학자들이 거의 고려하지 못했던 생태 문제는 더더욱 심각하다. 마르크스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뿐 아니라 생산력과 자연의 모순이 더 심각해지고 있다.


(3) 시장의 한계


물론 경제학자들도 시장이 그리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재화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아무도 시장에서 가격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완전경쟁을 가정하는 경제학원론의 전반부까지 이재용씨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면 아예 공급조차 되지 않거나(공공재) 너무 많은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외부성이 존재한다고 표현한다)도 비일비재하다.
 


공공재하면 국방을 떠올리면 된다.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가 나만 빼 놓고 지킬 수 없으며(비배제성), 내가 군대를 믿고 편한 잠을 잔다고 해서 남들이 잠을 못자는 것도 아니다(비경합성). 경제학은 우리에게 사회 전체를 위한다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럼 군대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걸까? "난 군대가 필요없다. 그러므로 돈을 낼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다. 아무도 군대라는 서비스를 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무임승차) 이 서비스는 시장에서 공급되지 않는다. 치안도 마찬가지이고, 동네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공공재는 국가가 공급하는 게 합리화된다. 그러나 시장만능론자들은 공공재도 부정하기 일쑤다. 부자들은 사설경호원을 고용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감옥도 민간이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금 한국에서도 일으키려 애쓰고 있는 민영화 열풍은 경제학의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

 

외부성의 외부란 시장의 바깥을 말한다. 사과꽃 향기는 모든 사람을 기분 좋게 한다(냄새 알레르기가 있다거나 사과를 먹고 심하게 체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빼고). 그러나 사과꽃 향기에 대해서 아무도 돈을 내지 않는다. 만일 사과꽃 향기의 시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꽤 많은 사람이 값을 치렀을 것이고 과수원 주인은 사과를 더 심었을 것이다. 즉 외부선(external good, 외부경제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의 경우는 현재의 시장에 맡겨 놓았을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적게 생산된다(뒤집어 말하면 사적 비용이 사회적 비용보다 큰 경우이다). (퀴즈. 잘 생각해 보면 사과꽃 향기는 공공재의 성격을 지녔다. 값을 치르라고 하면 누구나 "난 사과꽃 향기가 싫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반면 공해물질을 배출하는 볼펜 공장은 외부악(external bad, 외부불경제라고도 한다)을 생산한다. 공해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데 볼펜의 값에는 그게 반영되지 않는다. 즉 외부악이란 시장에 맡겨 놓았을 때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많이 생산되는 경우이다(이 경우에는 사회적 비용이 사적 비용보다 크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교정할까? 과수원 주인에게 보조금을 주거나 볼펜공장에 벌금을 물리면 된다(피구 해법). 이것이 정통적인 해법이고 많은 나라들이 애용할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코즈는 머리를 외로 꼰다. 볼펜공장 주위 사람들의 소유권이 확실하고 피해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면 볼펜공장 주인과 주민들이 협상으로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계산과 협상의 비용이 없으며 원활하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거래비용이 없다)이 붙어 있다.  사과꽃 향기나 공해 시장을 만들거나, 주위 땅을 다 사들이면(내부화) 똑같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사실 코즈가 주목한 것은 공해배출량 만큼 벌금을 물린다면 당연히 기업은 볼펜을 덜 생산하는 편을 택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볼펜이 덜 생산되어서 우리가 감수해야 하는 비효용과 공해가 없어져서 우리가 누리는 효용을 비교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볼펜공장 주인이나 주민 누가 계산해도 가장 바람직한 점은 찾아질텐데 그것은 원래의 생산량과 벌금을 물렸을 때의 생산량 사이의 어떤 점일 것이다. 이 점을 찾는 것이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코즈의 아이디어를 더 발전시킨 경제학자들은 이 모두 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얘기라며 코즈해법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코즈는 별로 탐탁치 않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는 기본적으로 거래비용이란 게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기업과 같은 조직이 생겨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는 한발 더 나아간다. 세상은 외부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유사외부성) 시장은 그 자체로 불완전하다(정보의 불완전성). 이 세상에 맛과 모양, 당도가 똑같은 사과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하나의 사과마다 하나의 시장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결국 어떠한 내용이든 규제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거의 모든 시장에 국가나 공동체가 세심하게 개입하지 않으면 안된다(스티글리츠 해법).


이외에 독점도 문제가 된다. 만일 이재용씨 혼자 볼펜을 생산한다면 그는 한국 볼펜시장의 수요곡선을 알 수 있게 된다. 완전경쟁이란 어느 볼펜업자도 수요곡선을 알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완전정보란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그저 시장에서 가격을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가격수용자). 그러나 독점이 되면 그는 가격을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보통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양보다 적은 양이 높은 가격에 공급된다. 이것도 대표적인 시장 실패의 사례인데 우리의 현실은 크고 작은 독점으로 가득차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정보의 독점이다. 인류 역사 상 어떤 사회에서도 완전정보의 사회란 없었고 민주주의가 시대의 가치가 된 이후에도 정보는 은밀하게 독점됐다. 시장이 중요한 조정 메커니즘이 된 이후 정보는 더욱 중요해졌다(과거와 달리 확실한, 그러나 남들이 모르는 정보는 손쉽게 부를 쌓는 수단이 되었다). 시장이 정교해질수록 정보의 조작 가능성도 높아졌다. 정보와 행복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나아졌다고 볼 근거는 찾을 수 없다.


(4) 시장의 근본적 한계


경제학이 얘기하지 않는 더 중요한 한계가 있다. 그것은 수요(demand)곡선에 돈 없는 사람들이 필요(needs)는 반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전 세계에서 지금 가장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있는 북한이나 아프리카 어느 나라일 것이다. 우리 사회만 보더라도 음식쓰레기가 넘쳐 날 정도인데 수요와 공급을 맞춰주는 보이지 않는 손, 시장은 결코 남은 식량을 이들에게 전달하지 않는다. 왜? 간단하다. 그들은 돈이 없다. 에이즈 약을 대량으로 생산한다 해도, 전체 에이즈 환자의 절반이 넘게 사는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로는 결코 전달되지 않는다. 시장은, 필요가 절박하면 절박할수록 높은 가격을 제시할 것이며 그 때 비로소 식량과 약이 전달되게 하는 장치인데, 돈이 없는 사람들은 아예 존재자체를 부정 당하는 것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100% 우연으로 그 나라에 태어났다는 사실, 또는 100% 우연으로 돈 없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 때문이다. 문제는 이 상황이 더 악화된다는 데 있다. 식량과 약이 전달되지 않으면 용케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생산능력을 제대로 갖출 수 없다. 또 다시 돈을 벌지 못한다. 그 아이들은 더 굶주리고 병에 더 많이 걸린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최초에 얼마나 돈 있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가 인생을 거의 다 결정한다면 그게 어찌 살만한 세상일 것인가? 경제학자들 말에 따라 새로운 시장을 만들면 만들수록 이런 불합리는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교육을 시장에 맡기고 건강보험을 민간보험으로 대체하면 양극화는 극단으로 진행될 것이다.


남들과 함께 더불어 잘사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을 가르치는 경제학은 없을까?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도) 경제학을 배워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다. 즉 현재의 경제학은 극복하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적어도 출발선에서는 똑같아야 한다. 나아가서 애초에 체력이 떨어진다거나 뜀뛰기에 좋지 않은 신체를 타고 태어난 사람은 남들보다 더 몇발자국 앞에서 출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교육, 의료, 주거, 식량, 환경은 모두에게 골고루 제공되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사회의 공공성을 이룬다. 얼마의 양을 어떤 방식으로 공급할 것인지를 따져서 사회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경제학자들이 할 일이다. 만일 우리가 여기에 합의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결국 갈갈이 찢어지게 되고 시장만능론자들이 목청껏 외치는 국가경쟁력도 형편없이 떨어지게 된다.


한 때 유토피아라고 불렸던 그 사회의 원리를 찾아내서 우리가 지금 이 땅에서 실현해야 한다. 여러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5) 국가의 한계


시장이론의 탄생과 더불어 사회주의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영글었다. 맑스는 시장의 무정부성을 통렬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공황을 맞을 수 밖에 없고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낭비(자본의 폐기와 실업)가 뒤따른다. 만일 이러한 낭비를 줄이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면 그 얼마나 좋을까? 문제는 생산과 소비, 인간의 욕구와 충족 정도에 대한 정밀한 계산이 즉각 가능하다는, 사회주의의 전제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시장이론에서는 각 개인이 즉각 그러한 계산을 해 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 사회주의에서는 국가가 그런 계산을 해낼 수 있다고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스티글리츠가 “시장으로 이르는 길”(원제는 “사회주의는 어디로(Whither the Socialism?))에서 예리하게 집어냈듯이 시장만능론과 국가만능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닮아 있는 셈이다.


문제는 정보이다. 내가 나의 욕구를 잘 모른다면 시장이론은 그 자체로 한계를 지니고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짐작할 수 있는 셈인데 그러한 욕구의 합을 계산해내서 사회 전체의 욕구와 생산능력을 국가가 알 수 있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1917년부터 시작되어 1989년에 막을 내린 ‘국가사회주의’는 이른바 사회주의 계산문제와 유인의 문제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흥미롭게도 모든 사회주의 혁명은 약 30-40년간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소련이나 중국, 북한 모두 1950-60년대까지 높은 경제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소련의 경우 미국의 포드주의 생산체제를 거의 그대로 이식했는데 노동자들은 혁명의 열기 속에서 열심히 일했으니 미국보다 생산성이 높은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혁명의 열기가 식고 인간의 본성 중 일부인 이기심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중앙집권적 사회주의 체제는 한계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중앙계획국(소련의 경우 GOSPLAN)이 당신의 욕구에 관해 질문하면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당신은 1년에 구두 두켤레가 꼭 필요한데 과거에 가죽의 부족으로 또는 정전 사태로 불가피하게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필요의 1/2만, 즉 당신의 경우에는 한 켤레만 공급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네 켤레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이건 특별히 당신이 사악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모두 그렇게 행동할 것이 뻔한데 나만 두켤레라고 솔직해 대답해서 맨발로 지낼 수야 없지 않은가?


생산능력에 관한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까? 우리 공장의 생산능력은 1년에 최대 1천켤레이다. 그러나 원자재의 공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우면 700켤레밖에 생산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300켤레의 부족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만일을 대비해서 700켤레가 내 최대생산량이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즉 소비에 관해서는 과장보고를, 그리고 생산능력에 관해서는 과소보고를 할 유인이 있는 것이다. 체계적인 정보의 왜곡이 일어날 수 있고 자원의 배분은 잘못된다.


노동자로서도 마찬가지다. 10명이 집단농장에서 공동으로 밀을 10톤 생산해서 똑같이 1톤씩 나눠가지는 경제에서 이기적 인간은 완전히 노는 선택을 할 수 있다. 9톤이 생산되어 0.9톤을 배분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9명이 그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들 역시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이다.


국가 사회주의에서는 웬만하면 기업이 도산하지 않는다. 관료는 기업을 도산시켜서 책임을 지는 쪽보다 보조금을 줘서 살리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비효율화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물론 이 모든 경우에 조사와 감시를 통해 이런 왜곡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행정 및 통제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자본주의 사회의 국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의 실패, 또는 정부 실패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회가 가능한 것일까?



Posted by mojiry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