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일 경향신문

망국의 등수 경쟁

정태인(경제평론가)


창밖 감잎이 찬 바람에 툭 떨어지는 지금, 아이들의 귓불은 후끈 달아올랐을 것이다. 인생을 좌우할지도 모를 1점 때문이다.
우리 어른들은 지금 정확히 1등부터 71만2227등까지 아이들의 이마에 ‘주홍글씨’를 새기는 중이다. 한국과 같은 학력 사회에서 이 ‘주홍글씨’는 평생 아이들을 옥죄는 뿌리가 될 것이다.

“등수요, 경쟁이라니요?”
핀란드 교육청장을 20년간 하면서 “핀란드의 교육혁명”을 일궈낸 에리키 아호가 백발을 저으며 반문한다. 아이들은 모두 다른데, 어떤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고 어떤 아이는 뜀뛰기를 잘하는데, 아이들은 모두 다르고, 그래서 또 평등한 건데 등수를 매긴다니 도대체 말이 되는 얘기냐는 것이다.
“만일 교육에 경쟁이 있다면 그건 자기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어떻게 끌어내서 자아를 실현할 것인가라는 자기와의 경쟁 뿐입니다.”
하여 교사들의 책임이란 아이들이 무엇을 잘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등수도 없고 경쟁도 없는 핀란드 교육이 객관식 국제비교시험(PISA)에서도 10년동안 세계1위를 했고 대학경쟁력 또한 1위라는 얘기까지 꼭 덧 붙여야 하는 게 참으로 구차한 우리의 현실이다.




더구나 우리의 등수 경쟁은 지극히 불공정하다.
남들이 다 사교육을 시킨다면 아이의 성적을 걱정하는 부모는 아이를 학원으로 내몰 수 밖에 없다. 남들이 아무도 안 시킨다면? 우리 아이만 하면 등수가 올라갈테니 역시 과외를 시키려 할 것이다.

이 둘을 합치면 남들이 사교육을 시키건, 안 시키건 사교육을 시키는 게 낫다. 이건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이다. 어쩔 수 없는 경쟁이 모두에게 나쁜 결과를 낳는다. 모두 똑같은 사교육을 시킨다면 돈 들여 애들 고생만시키고 등수는 제 자리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황은 더 나쁘다. 우리 모두 허리띠를 조르고 졸라 더 좋은 학원에 보내려 한 결과, 사교육비는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결국 이 게임은 돈 많은 사람이 승리한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은 이 게임의 구조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이런 게임이 계속되어 세습까지 일어난다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망하게 된다. 3대 세습은 저 위쪽에만 있는 게 아니다.

치열한 경쟁 덕에 나라 경쟁력이 높아질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 게임에서 건진 학력이란 구글을 치면 다 나오는 토막 지식들 뿐이다. 잡동사니와 문제유형까지 다 외는 건 오로지 수많은 문제의 정답을 짧은 시간에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수학도 예외가 아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스티븐 호킹도 정답을 다 맞추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드라마 “공부의 신”에 나오는 전설적 학원 강사가 “수학도 외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것이다.

그 대가는 처절하다. 온갖 ‘지식’을 머릿 속에 분리 수거하는 동안 창조력과 상상력은 사라진다. 무려 12년 동안 우리들은 돈들여 아이들을 괴롭히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을 체계적으로 없애 버리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사회는 또한 망한다.

개미들은 집안의 대표선수 하나만 낳아서 한번 승부를 걸어보자고 마음먹는다. 세계 최저의 합계출산율, 1.12가 그 결과다.
결국 인구는 급속하게 줄어들고 상상력은 형편 없는데, 돈많은 집 상위 1%가 그 사회를 대대손손 지배한다. 100% 망할 수 밖에 없다.

희망은 있다.
요즘 엄마들은 “남들이 안 시키면?”이라는 질문에는 “우리 아이도 안 시켜요”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되면 “죄수의 딜레마”는 “신뢰게임”(assurance game)으로 변한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가 경쟁 대신 협력, 즉 등수없는 교육을 택할 수 있다.

경기도에 이어 서울과 전북 등에서 시작한 혁신학교는 그 결실이다. 이런 엄마들의 소망으로 아래서부터 하나 하나 바꿔 나가면 된다.

나는 아이들이 떨어지는 감잎을 보면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를, 첫(?) 사랑을 꿈꾸기를 바란다. 뜨거운 귓불 대신에 뜨거운 가슴을 가지길 바란다. “1929”, “뉴딜” 같은 낱말을 외는 게 아니라 대공황의 역사 속에서 우리 현실을 곱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야 아이도 살고 우리 나라도 산다.


Posted by moji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