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영국 날씨 같다.” 아내와 함께 아버지의 병문안을 가는 길, 차창 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스산했다. 우리는 1996~1997년 겨울을 영국에서 보냈다. 외환위기는 외국에 있는 사람에게 훨씬 더 절박하다. 한국에서 똑같은 돈을 부쳐도 파운드화로 바꿀 때마다 형편없이 줄어드는 상황을 매달 겪었다. 소문처럼 모라토리엄이라도 선언하는 날에는 우리 가족은 영락없이 국제 거지가 될 판이었다. 설령 한국에 수십억원의 재산이 있다 하더라도 단 1원도 달러나 파운드로 바꿀 수 없을 테니….

 

물론 지금 한국 경제는 그때보다 낫고 나는 한국에 있다. 하지만 이번엔 세계 전체가 2008년 금융위기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지난 30년간의 ‘금융화’가 원인이다. 오랫동안 낮은 이자율과 부동산과 금융시장의 버블 속에서 나라, 기업, 가계 모두 빚의 무서움을 잊어버렸다. 미국이 주도해서 전 세계가 빚을 “레버리지”라고 부르면 최신 경영기법쯤으로 여겼다. 다행히 한국 기업은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건전성 규제 때문에 조금 낫지만 가계 부채는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앞으로의 소득은 불투명한데 빚이 많다면 소비를 줄이는 건 당연한 처사다. 기업의 ‘야성적 본능’은 자중할 때라고 소리친다. 2008년 가을의 리먼 브러더스 사태 이후, 매년 이때쯤이면 국내외의 ‘믿을 만한’ 경제예측기구들이 내년엔 서서히 회복될 거라고 5년이나 외쳤지만 아직 아무도 “이젠 회복 국면”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전 세계적인 ‘양적완화’(주로 중앙은행의 장기 국채와 부실채권의 직접 매입)에 따라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마치 모르핀처럼 미래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 있을 뿐이다.

 

급기야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라는 음울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1980년대 말부터 미국의 3대 천재로 일컬어졌던 로렌스 서머스, 폴 크루그먼, 제프리 삭스가 11월 들어 일제히 장기침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단순화하자면 이제 마이너스 실질금리가 ‘새로운 정상’(new normal)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처럼 이자율을 0으로 만들어도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하여 크루그먼은 인플레이션을 일으켜서 억지로라도 소비를 늘리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삭스는 에너지와 생태 인프라, 교육과 보건에 대한 장기투자가 더 낫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오바마 정부는 결코 삭스의 제안을 실천할 수 없다. 공화당과 다수의 경제학자들이 당장 빚이 문제니까 정부 빚부터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상태에서 정부 지출까지 줄어든다면? 당연히 총수요는 더 줄어들 것이고 양적완화가 계속되더라도 미국은 침체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다”는 주장이 이렇게 딱 들어맞는 경우를 또 찾기란 쉽지 않다.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도 무릎을 칠 것이다. 아니 한국이 더 맞는 사례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이미 박 대통령은 국회가 10개월이나 지난 ‘과거사’에 얽매여서 민생을 살리는 법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다고 국회에 책임을 돌렸다.

 

 

공약이 어디있지(경향DB)


하지만 한국에서 “경제의 발목을 잡는 정치”는 바로 대통령 자신이 하고 있다. 지난 50년간 우리 경제를 이끌어 왔던 수출은 세계적 장기침체 상황에서는 미덥지 못한 존재다. 하지만 중산층의 소득은 옆으로 걷고 저소득층의 수입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그나마 형편이 좋은 상류층의 돈은 또다시 거품을 일으키는 쪽으로 몰리고 있다. 현금을 쟁여 놓은 최상위 재벌들도 세계적 ‘장기침체’에 대규모 투자를 할 수는 없다.

 

결국 경제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면 정부가 증세를 해서, 서민들의 소비가 늘어나도록 해야 하고 환경과 교육, 보건에 장기투자를 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엉뚱하게도 경기침체를 빌미로 지난 대선 때 약속했던 ‘경제민주화’와 ‘생애 맞춤형 복지’를 내팽개쳤다. 지금이라도 아래로 돈이 흐르도록 복지 예산을 대폭 늘리고 경제민주화를 약속한다면 한국의 야당은 틀림없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은 경제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서민들이 지난 6년간의 음울한 날씨를 벗어나 따뜻한 봄을 맞을 때도 이젠 되지 않았는가?


Posted by moji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