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서울광장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2008년 100일 이상 서울광장과 그 주변을 함께 누볐던 ‘전우’, 지금은 <프레시안>의 기자가 된 이명선 아나운서의 눈물 어린 협박 때문이었다. <프레시안>이 5년 전처럼 서울광장을 인터넷 생중계하겠다는데 어찌 마다하랴.


 

하지만 고품격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방송장비는 최악이었다. 카메라도 달랑 한 대인 데다 무선 마이크마저 없어서 카메라에 달린 선 짧은 마이크에 둘이 얼굴을 맞대다시피 해야 했다. 화면에 얼굴이 어떻게 비칠까 신경 쓸 만한 우리의 미인(?) 여기자는 워낙 ‘막장 방송’에 익숙해서 그런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는 ‘막장 방송’의 베테랑답게 30분 넘는 방송을 무사히 마쳤다. 어스름과 함께 광장을 메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5년 전과 뭐가 다를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촛불집회 (경향DB)


 

5년 전에는 미국을 방문한 대통령의 한마디 때문에 여중생들이 먼저 뛰쳐나왔다. “나 이제 15살, 살고 싶어요”라는 팻말을 목에 걸고. 2008년 그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폭발의 시작이었다. 아이들에 이어 미니스커트 부대가, 유모차 부대가, 그리고 예비군 부대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반면 국정원의 선거 개입은 젊은이들에겐 그리 실감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마치 유신 시대로 돌아간 듯, 정보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이 사건이 슬그머니 묻혀버린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떤 선거 결과도 믿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에게 이번 사건이 과연 피부에 와 닿고 살이 떨리기까지 할까? 그래서 유독 50대 이상이 눈에 많이 띄는지도 모른다.

 


문득 참여정부 초기, 이른바 4대 악법 개폐에 정권의 명운을 걸었다가 결국 진흙탕 싸움 속에서 민생을 내팽겨쳤다는 비난을 받은 기억이 떠오른다. 민주당이 광장으로 나오기 전까지 새누리당의 전략이 바로 국정원 사건을 정쟁의 진흙탕에 밀어넣는 것이었다. 뜬금없이 NLL 문제를 꺼내들고 적반하장으로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존재 유무까지 지리한 싸움으로 만들어놓고선 후안무치하게도 이젠 민생 문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새누리당의 전략은 이번에도 유효할까.


 

5년 전 광우병이 우려되는 쇠고기 수입 문제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삶을 직접 건드리는 각종 민영화 문제, 그리고 4대강 사업으로 확장됐다. 이번에는 정부의 세법 개정안이 서울광장에 민생 문제가 등장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민주당이 ‘세금폭탄’이라는 잘못된 틀을 사용하는 바람에 곧바로 박근혜 대통령의 반격을 받았다. 웬만한 문제에는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을 실천하던 대통령도 지지자의 불만이 높아지자 즉각 “원점에서 재검토”를 지시하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했다.


중산층 세금폭탄 저지운동 나선 민주당 (경향DB)


 

‘어명’을 받들어 기획재정부가 하루 만에 내놓은 수정안은 총급여 3450만원에서 5500만원 사이 중산층의 증세를 없던 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중산층 유리 지갑에 대한 ‘세금폭탄’을 거둬들였으니 이제 “그 입 다물라”는 얘기다. 다행히 민주당이 ‘부자 증세’로 방향을 틀어 이명박 감세의 원상복구 등을 내걸었지만 이미 김이 새버린 건 사실이다.


 

‘e-시민회의’ 통해 시민의 요구 사항 정리할 수도


 

이번 촛불은 가을에도 타오를까? 만일 현재의 국정원 문제가 다른 민생 문제와 결합된다면 가능할 것이다. 가령 어르신들은 은근슬쩍 줄어든 ‘노인연금’에 불만일 것이고, 20대들은 박근혜 후보의 반값 등록금이나 청년 일자리 공약을 따져 물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당장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전세금 폭등이다. 아마 올가을 절정에 이를 이 문제에 대해서 전세금 상한제를 요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지하상가의 주택자금대출 광고판 앞을 한 시민이 지나고 있다.


5년 전에 비해 언론 상황은 훨씬 나쁘다. 조·중·동은 물론 방송 3사도 촛불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그 많던 인터넷 1인 방송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가을에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행사가 줄줄이 열리면 어떨까? 음악·영화·사진·만화가 어우러진 촛불문화제가 열린다면 촛불은 스스로 어떤 구체적인 목표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아예 인터넷에 ‘e-시민의회’를 만들어서 시민들의 요구 사항을 정리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5년 전에도 광장의 열기를 바탕으로 인터넷에 정책 공간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번의 차분한 흐름은 그 시도를 실현하기에 더 좋은 상황이 아닐까? 집에도 가지 않고 100일 동안 방송하는 게 아니라면 나도 짬짬이 서울광장에 나가서 지금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라. 


 

* 이 글은 시사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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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ojiry